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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지쇼 3년(1179년) 11월 17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의 신하를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지쇼 3년의 정변(治承三年の政変)'을 결행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에 발각된 시시가타니의 음모(시시가타니의 음모)에서 '반 타이라 가문'의 기치를 올리지만, 현실을 모른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다 실패해 버립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주모자 중 한명이었으나 훌륭히 살아남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부상조로 서로를 돕던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이에 큰 도랑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음 해 11월에 키요모리의 딸인 토쿠코(徳子)가 사내 아이를 출산합니다. 토쿠코는 당대의 덴노  제80대 다카쿠라덴노(高倉天皇)의 중궁(中宮)[각주:1]입니다. 키요모리는 조속히 자신의 핏줄을 황태자의 자리에 앉히려 합니다. 그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이를 부탁합니다. 결국 그 아이는 황태자가 되고, 그 주위는 타이라 가문이 굳히게 되어 고시라카와 법황 측의 인물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고시라카와 법황



  지쇼 3년(1179년) 6월,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향후의 가장 큰 불씨가 됩니다. 그녀는 후지와라 가문의 연장자인 코노에 모토자네(近衛基実)의 후처가 되고 있었으므로, 전실이 죽고 나서는 남겨진 많은 섭관가령(摂関家領)을 그녀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전실이 죽은 뒤에 당연히 그 영지는 친자식인 모토미치(基通)나, 쥰모(准母)로 있었던 다카쿠라 덴노(高倉天皇)의 것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시라카와 법황은 관백, 마츠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와 연합해, 이 영지를 '시라카와 쿠라와즈카리(白河殿倉預)'로 해버려 사실상 몰수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2개월 후의 윤 7월 이번에는 키요모리의 장남 타이라노 시게모리가 병사합니다. 그리고, 그 후의 10월 인사를 통해, 법황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스에요시(藤原季能)가 에츠젠노카미가 되어, 시게모리의 영지도 사실상 몰수되게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불과 8세의 모토후사의 아들이 당시 20세인 모토미치를 눌러 곤츄나곤(権中納言)으로 승격한다고 하는 제멋대로의 인사처리가 일어납니다. 이런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멋대로인 처사에 더이상 키요모리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모치히토왕



 그는 수천기의 대군을 인솔해 후쿠하라(福原)에서 상경한 지쇼 3년(1179년) 11월 17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신하인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모토미치를 관백으로 임명했습니다. 물론, 키요모리에게 임명의 권한은 없기 때문에, 임명한 것은 다카쿠라덴노였습니다. 그리고 고시라카와 법황은 유폐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로 타이라 가문은 더욱 힘을 얻어 「타이라 가문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 아키쓰시마(秋津島)는 불과 66개국, 타이라 가문의 지행(치교)하는 나라 30여개국, 이미 반국을 지배하고 있다' 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때 영지가 몰수된 이 중 하나가,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 3 황태자였던 모치히토왕(以仁王)이었습니다. 키요모리는 다음 해의 2월, 다카쿠라덴노를 쫓아내고 불과 2세인 자시의 손자를 안토쿠덴노(安徳天皇)로 즉위시키는 폭거를 일으킵니다. 이에 모치히토왕은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겐페이 쟁란이 본격적으로 개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