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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1) 나라 토벌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1) 나라 토벌



지쇼4년(1180년) 12월 28일, 타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의 나라 토벌이 있었습니다.


 타이라노 시게히라는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5남입니다. 오와리의 스노마타 전투나 미즈시마, 무로야마 전투 등, 후에 포로로 잡히는 이치노타니 전투 이외에는 전승의 무용이 뛰어난 무장입니다. 그 용모는 모란의 꽃에 비유되는 미남으로, 성격도 섬세했던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타이라쪽 기록인 「타이라 가문 이야기」뿐만 아니라, 미나모토 측의 기록에도 그에 대한 칭찬이 쓰여있는 걸 보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나라를 토벌해야 했을까요?



출진하는 타이라노 시게히라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이로인해 후쿠하라로 천도했던 키요모리는 다시 수도를 헤이안쿄로 재천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2월 25일 시게하라는 아버지 키요모리의 명령에 의해 나라의 악인 추방을 하러 갑니다. 나라는 불교의 성지입니다. 그런데 키요모리는 이 나라 공격때, 도다이지(東大寺)를 시작으로 하는 일곱 개의 절과 당탑이 불타고, 많은 사망자를 내 버려, 이 일이 당사자인 시게하라는 물론 타이라 가문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강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원래 코후쿠지(興福寺)는 후지와라 가문의 절이고, 도다이지는 쇼무덴노(聖武天皇)의 보물을 쇼소인(正倉院)에 보관할 정도로 정계와 인연이 깊은 절입니다. 떠라서 백성들의 신앙도 매우 두타워, 그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불전을 태워 버리는 일은 일본의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타이라 가문은 공격을 한 것일까요? 그 원인은 규안(久安) 3년(11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날 키온(祇園)의 행사에 참가하고 있던 키요모리의 아버지 타다모리(忠盛)의 가신과 키온지(祇園寺)의 쇼오지(所司)[각주:1]와의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혼잡에 타이라 가문의 화살이 절에 꼽혀 본산인 히에이잔(比叡山)을 시작으로 불교계에 '반 타이라 가문'의 기운이 강해지게 됩니다. 이를 눈여겨 본 것이 키요모리에게 쫓겨난 고시라카와 법황이었습니다.(지쇼 삼년의 정변) 히에이잔의 승병은 그 고시라카와 법황이 최대의 권력을 휘두를 떼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카모가와의 물, 주사위의 눈 그리고 히에이잔의 승병이라고 할 정도로 강성한 세력이었습니다. 이제 겐페이의 전투에서 이들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게하라는 나라 토벌을 결의하게 됩니다.



나라를 태워버린 시게모리



 당대의 전투는 대체로 2~3시간에 절정을 맞이하고 승패가 결정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공격은 12시간의 시간을 소비해 버렸습니다. 이는 미나모토의 발호를 들은 히에이잔이나 온죠우지(園城寺)의 승병들이, 이 코후쿠지에 전면 협력의 태세를 취해, 교토에서 나라에 들어오려고 하는 적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옛부터 '나라고개 넘어 쿄카이 도우(奈良坂越えの京街道)'라 불린 헤이안쿄(平安京)와 헤이조쿄(平城京)를 연결하는 곳이 다름아닌 나라의 입구에 해당되는 나라비탈(奈良坂)입니다. 승병들은 그 비탈에 있는 한냐지(般若寺)에 성곽을 쌓아, 타이라군에게 저항합니다. 27일의 낮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이 되어, 타이라군은 어둠을 쫓기 위해 오오타이마쯔(大松明)에 불을 붙입니다만, 이것이 번져 나라 일대를 태워 버립니다. 눈 앞의 한냐지는 물론, 고호쿠지와 도다이지의 대불전마저 화마에 휩싸이게 됩니다.


 문헌에서는 이 때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타이라 측이 불을 질렀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정치보다 위에 있는 시절입니다. 아마, 실화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로가 되었을 때도 당당하던 시게하라가 '나라를 토벌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군요. 아무튼 승병을 무찌른 타이라의 군세이지만, 대불을 태웠다는 불경으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됩니다.

  1. 관청의 공무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