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가타토우케 전투(3) 구리가타토우케 전투 발발
지에이 2년(1183년) 5월 11일, 미나모토 1가 타이라를 역전하는 키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구리카라토우케(고개)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기 때문에 앞의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타이라 측으로 배신한 에치젠 헤이센지의쵸우리 사이메이(長吏斎明)의 안내로 엣츄 젠지 세이슌(越中前司盛峻)에게 5천의 군사를 붙여 엣츄로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와 전투가 일어나 한아노 전투가 발발해, 키소군이 승리했습니다.(한야노전투)
키소노 요리나카와 토모에 고젠
이에 10만의 군세를 모아 진군한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는 시라오산(白雄山)을 목표로 합니다. 이 때, 타이라의 적기는 10만 부대를 알리는 듯이 산을 붉게 물들여 마치 단풍이 든 듯 했습니다. 한편 그 무렵의 요시나카는 에치고에서 진군하는 도중에 군사를 모으며 엣츄에 들어와, 어떻게든 5만 정도의 군사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타이라의 대군이 두 부대로 나뉘어져 본대는 토나미산을 향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됩니다. 토나미산을 넘고 토나미 평야에 들어가지면 넓은 장소에서의 전투가 되어, 수가 적은 요시나카는 불리하게 됩니다. 타이라군이 토나미산에서 내려온다면 필패입니다. 그는 토나미산을 하산하려면 지나야 하는 히노미야 숲(日宮林)에 진을 쳐 미나모토의 백기를 휘날립니다. 이 긴장은 팽팽해져 마치 당겨진 활시위같아 졌습니다.
하지만 키소뇨 요리나카의 작전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습니다. 지에이 2년(1183년) 5월 11일의 밤, 칠흙의 장막이 걷히기 전에 요시나카는 약간의 군사를 보내 타이라군의 정면에 부닥칩니다. 이렇게 몇번 소규모 전투가 있은 뒤에 소수의 군사는 요시나카의 본대로 돌아갑니다. 타이라군은 이에 '키소군이 드디어 공격을 포기했구나'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사이에 요시나카의 군대는 야음을 틈타 타이라군세를 감싸도록 포진합니다. 히구치 지로우 카네미치(樋口次郎兼光)가 3천기, 이마이 시로우 카네히라(今井四郎兼平)가 2천기, 코무로 타로우(小室太郎)가 3천기, 토모에 고젠(巴御前)이 이끄는 1천기는 구리가타토우케를 사이에 두어 남북에 포진합니다.
요시나카의 예측대로 '다음의 공격은 내일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한 타이라 군은 경계하면서도 군장을 풀고,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행군의 피로도 있어, 밤도 깊어지자 잠들어 버리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진영에 어둠이 깔리고, 적막이 흐르는 와중에 이를 찢는 듯이 산에 울려 펴지는 함성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나각을 불고, 큰북을 치며 일제히 카부라나(鏑矢) 2을 쏘아 맞히며 북쪽과 남쪽에 나누어져졌던 요시나카의 군세가 공격을 시작합니다. 사방이 바위에 둘러싸인 산에서 설마 정면 이외에서 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타이라 군은 암흑속의 나무 사이에서 보이는 무수한 백기에 깜짝 놀랍니다. 어둠속에서는 붉은 기보다 흰 기가 더 눈에 띄기 때문에, 타이라군의 사기는 떨어져 갑니다.
협곡에서 당하는 타이라군
함성 소리를 들은 요시나카가 인솔하는 본대 3만기는 함성소리를 들고 추격을 개시합니다. 산중에 울려 퍼져 건너는 함성의 소리에다 곳곳에서 보이는 백기에 타이라의 군세는 우왕좌왕하며 도망칠 뿐입니다.「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 의하면 이 때 500마리의 소의 뿔에 횃불을 묶어 타이라군을 쫓아 버린 '화우의 계(火牛の計)'를 썼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기습에 당황한 타이라군은 도망치나, 그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은 깊고도 깊은 골짜기 였습니다. 타이라의 군대는 차례로 떨어져 골짜기에 삼켜집니다. 「겐페이 성쇠기」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화우의 계
아버지가 떨어지고, 아이도 떨어지며 주가 떨어지고, 가신도 떨어졌다. 말에는 사람, 사람에는 말이 겹쳐져 추락했다. 앞에 떨어지는 사람은 뒤에 떨어지는 사람과 부닥치고, 먼저 떨어진 사람은 뒤에 떨어지는 사람에게 눌러졌다.
이로 인해 타이라군은 재기불능이 됩니다. 한편, 시오산에 있던 타이라 군대를 이끌던 타이라노 미치모리(平通盛)는 이 참극을 듣고 12일에 철퇴를 시작합니다. 대장인 코레모리도 간신히 도망가 카가까지 철되해 시오산에서 합류합니다. 이 승리에 기세가 붙은 요시나카 군대는 계속 진군해 시노오라, 아타기에서 적과 부딪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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