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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1) 에츠젠, 카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1) 에츠젠, 카가 전투



 주제이 2년(1183년) 5월 3일, 호쿠리쿠 일대에서 전개된 구리카라토우케(고개) 전투의 전초전인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타이라군이 카가를 제압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그는 요코타강변 전투에서도 크게 승리합니다.(요코타강변 전투) 이렇게 타이라 가문의 태양이 점점 져 갈 무렵, 미나모토 가문 내에서 불온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키소(미나모토)노 요리나카 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토모의 장녀 오오히메(大姫)와 요시나카의 장남 요시타카(義高)의 결혼을 통해 이 긴장관계는 완화됩니다.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인질과 다름없이 아들을 가마쿠라에 건네준 요시나카는 요리토모보다 먼저 타이라를 토벌해, 상경하는 것으로 겐지의 동량으로 결합 시키려 합니다. 그 때문에 교토에서는 '요시나카가 히가시야마, 호쿠리쿠에서 5만의 군사를 인솔해 당장 공격해 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에 타이라는 각지에 구원을 요청한 뒤, 주제이 2년(1183년) 4월 17일 아침 8시, 키요모리의 손자 타이라노 츠네마사(平惟盛)를 총대장으로한 10만의 대군이 호쿠리쿠를 목표로 해 교토를 출발합니다. 동국이나 호쿠리쿠는 이미 미나모토 가문에 넘어갔지만 큐슈, 시고쿠나 산요, 야마게, 킨키등지에서는 아직도 타이라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이런 대군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킨키 지방은 전년부터는 큰 기근이 있어, 대군의 병량을 준비하지 못하고, 군사들이 근린의 마을에서 약탈을 반복하며 비와호동서로 나누어져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민폐한가득의 진공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26일, 에츠젠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버티는 요시나카의 세력은 히우치카성(燧城)을 맡는 시나노의 니시나 모리히로(仁科守弘), 카가의 모리 미츠아키(林光明), 히키타 슌페이(疋田俊平), 쿠라미츠 나리스무(倉光成澄) 등이었습니다. 이들의 군세는 5천 남짓, 헤이케의 10만에 대항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약세입니다. 그들은 농성을 결의하고 성벽을 따라 흐르는 두 강의 합류지점에 목책을 세워 물길을 막아, 인공 호수로 성을 둘렀습니다. 이를 앞에둔 타이라군은 진공할 수 없어습니다.


 하지만 배신자가 나왔으니, 에츠젠 헤이센지(平泉寺)쵸우리 사이메이(長吏斎明)였습니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인공호수를 돌파할 방법을 적어 화살로 날립니다. 결국 타이라군은 목책을 파괴해, 호수를 파괴하고 물을 건너 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이 인원차이를 이길 수 없어 에츠젠의 카죠우성(河上城)으로 도망쳐 농성합니다, 하지만 역시 5만 대군을 이길 수는 없어 또 카가로 도망칩니다. 카가는 어떻게든 사수하기 위해 모리 미츠아키를 중심으로 카가 산죠하라(三条野)에 진을 치고 타이라군과 맞섭니다. 하지만 배신한 사이메이가 길을 안내해, 도 패퇴하고 맙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5월 3일에 카가도 점령당하고 맙니다.



이마이 카네히라 초상화



 하지만 요시나카도 가만히 있을리 없고, 곧바로, 키소 사천왕의 한명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에게 6천의 군사를 주고 선발대로 출진시켜, 자기 자신도 출진의 준비를 합니다. 타이라 가문이 승리의 술에 만취해 있었을 무렵, 카네히라는 오야시라즈(親不知)의 해안을 달려, 진즈가와(神通川)를 넘어 엣츄까지 철퇴하고 있던 잔존 타이라 군세와 합류합니다. 드디어 요시나카의 반격입니다만, 카네히라는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엣츄를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