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지쇼5년(1181년) 3월 16일, 겐페이 전투에서 얼마 안되는 타이라의 대 승리인 전투 스노마타가와 전투(墨俣川の合戦)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이로인해 후쿠하라로 천도했던 키요모리는 다시 수도를 헤이안쿄로 재천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동국의 무장들은 '타이라 가문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에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복위시키고, 명령을 받아 '타이라 가문이 관군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나라를 공격해 도다이지나 고호쿠지의 반 타이라 가문의 불교 세력을 억누르는데 성공했습니다.(나라 토벌) 이로 인해 타이라 가문은 '불교의 적(仏敵)'이라 불리게 됩니다.



스노마타가와 전투 사적지



 지쇼 5년(1181년) 키요모리는 병에 쓰러집니다. 나라 공격의 직후였기 때문에, 당연히 '키요모리는 부처의 벌로 죽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던 도중 2월 4일, '하나 남은 무념은 효에노스케(兵衛佐)[각주:1]의 목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는 유언을 남기고, 키요모리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음해 3월 타이라노 시게히라는 3만의 군을 인솔해 동국으로 진격합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이것을 맞아 싸우는 미나모토 측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인솔하는 6,000의 군세였습니다. 유키이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의 의동생으로, 모치히토왕의 영지를 전국에 퍼뜨린 책사였습니다.


 지쇼 5년(1181년) 3월 16일, 양자는 오와리와 미노의 국경 부근을 흐르는 스노마타가와 양쪽에 진을 쳐, 대치했습니다. 여기서, 밤의 어둠을 틈타 제일 먼저 적을 습격하려는 미나모토의 무장은 이 전투에 2,000의 군사를 인솔해 참전하고 있던 기엔(義円)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습은 실패합니다. 유감스게도 도하 한 직후에 타이라 측에 발견되어 아치 싶은 사이에 포위되어 2,000의 군사는 괴멸하고 기엔도 토벌당해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본대의 유키이에(行家)는 당황해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타이라의 압도적 승리, 스노마타가와 전투



 본래 강을끼고 대치할 때, 한 편이 도하를 하게 되면 압도적으로 불리하기에 보통 5배 이상의 대군이 있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전국시대 굴지의 영웅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맞붙었을 때도 양자가 강을 쉽게 넘지 못해 4차 전투 하치만바라 전투에서만 본격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유키이에는 반대로 자신이 타이라의 5분의 1의 병력만이 있었느네도 불구하고 도하를 시작해 압도적으로 패배해 버립니다. 하지만 유키이에 본인은 잘 빠져 나가지요. 이렇게 해서 타이라 가문은 엄청난 대승을 거둡니다.

  1.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