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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3) 요코타 강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3) 요코타 강변 전투




지쇼5년(1181년) 6월 14일, 타도 타이라의 기운이 강해지는 중에, 호쿠리쿠에 요시나카의 이름을 널리 알린 요코타 강변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요코타 강변 전투 그림



 신슈의 반 타이라 무장들을 아군으로 끌여들어 이치하라 전투에 승리한 요시나카는 그 기세로 죽은 아버지의 영지였던 우에노의 타고(多胡)군으로 진출합니다. 그러나 그 무렵에 이미 관동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배아래 있어, 더  진행하면 요리토모와 충돌하게 됩니다. 요시나카에게 요리토모는 사촌형제이지만 아버지를 살해한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의 남동생이기에, 원수입니다. 하지만 지금 동족인 미나모토 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면의 적은 타이라이기에 일단 타이라를 상대해야 합니다. 


 요시나카는 타고군의 무장을 수중에 넣은 뒤에, 그 이상의 관동 진출은 단념하고 호쿠리쿠쪽을 공격할 결의를 굳힙니다. 그러나 신슈의 북쪽, 즉 에치고에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는 대호족 죠우타로우 스케나가(城太郎資永)가 있었습니다. 신슈의 움직임을 알게된 타이라 가문은 조정을 시켜 스케나가에게 '키소 토벌'의 명령을 내립니다. 처음에는 달가워 하지 않던 스케나가는 이윽고 세력을 파죽지세로 확대하는 요시나카에게 위협을 느껴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스케나가의 휘하에는 에치고는 물론 데와, 아이즈의 무사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치하라 전투의 패잔병을 가세한 대군 4만(6만이라는 설도)을 인솔해 신슈에 쳐들어갑니다. 대군을 3 부대로 나누어 하마코 헤이타(浜小平太), 하시다 타로우(橋田太郎)가 이끄는 1만기는 지쿠마(筑摩)를 넘어, 츠하다 무네치카(津波田宗親)가 이끄는 1만기는 우에다(上田)를 넘고, 자신이 이끄는 군세 4만은 요코타 강변에 진을 치게 됩니다.


  이 요코타 강변은 400년 후,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대결이 일어나는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일어난 장소입니다. 그들역시 치쿠마가와(千曲川)를 끼고 상대의 틈을 보게 됩니다. 요다성(依田城)에서 스케나가의 출진 소식을 들은 요시나카는 오치아이고로우 카네유키(落合五郎兼行), 시오다하치로우 타카미츠(塩田八郎高光)를 시작으로 젖형제인 이마이 시로우 카네히라(今井四郎兼平), 히구치지로우 카네미츠(樋口次郎兼光) 그리고 첫 출진을 하는 카네히라의 여동생 토모에 고젠(巴御前)이 가세한 시나노, 우에노의 군사 3천기를 인솔해 요교타 강변 기슭의 하쿠쵸가와(白鳥川)에 진을 쳤습니다.



당시 전황도



 이치하라의 전투는 소규모 전투였기에 요시나카에게 대 호족상대로 하는 본격적인 전투는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4만, 이쪽은 3천 뿐입니다. 지쇼 5년(1181년) 6월 14일 오전 8시 요시나카는 우선 소수 정예로 치쿠마가와를 건너, 스케나가의 대군에 도전합니다. 그 수는, 불과 100기였습니다. 그런데 ,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 의하면 전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타로우가 사만여 기를 이끌고 있어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러나, 백여 기가 달려들어, 약간 퇴각하게 되었다.


 100기 뿐인 군세가 달려들어 마음껏 날뛰고 다시 본영에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의표를 찔린 것이지만, 이런 것은 대군을 인솔하는 대호족 죠우타로우에게는 큰 모욕입니다. 그는 이차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시나노의 키사하라 요리나오(笠原頼直)를 불러 '기회를 줄터이니, 설욕을 하고 오라!'라며 그에게 85기의 정예를 주고 치쿠미가와를 건너 공격하게 됩니다. 죠우타로우의 군영에서는 우에노의 타카야마도우(高山党) 300기가 출격해 맞아 싸웁니다. 이 전투는 일진 일퇴의 격렬한 전투가 되어, 타카야마도우는 삼분의 일인 93기로 감소하고, 카사하라 부대는 절반인 40여기가 살아 남았습니다. 이에 우에노의 사이교스케(西行助)가 50기를 인솔해 출진하고, 죠우타오우 군영에서는 토베노 이에토시(富野家俊)가 불과 13기로 그것을 맞아 싸워 50기는 15기로, 13기는 9기로 감소하는 분전을 벌입니다.



토모에 고젠 초상화



 그런데 이렇게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어서야 가망이 없습니다. 죠우타로우의 군세는 무려 4만, 이렇게 소모전을 반복하면 필패입니다. 여기서 요시나카는 계책을 가다듬었습니다. 시나노 겐지의 이노우에 쿠로우 미츠시게(井上九郎光盛)를 불러, 그에게 '적기(赤旗)'를 주어 강의 하류에서 우회해 적진의 측면에서 접근하게 합니다. 갑자기 후방에서 등장한 적의 깃발을 본 죠우타로우는 '우에다를 넘어 츠하다 무네치카의 원군이구나! 당장 강을 건너 적을 박살내라!'고 명합니다. 이 명령을 들은 미츠시게는 '알겠습니다!'라며 적에게 가까워져, 돌연 '백기(白旗)'를 들어 죠우타로우의 군사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본 요시나카역시 돌격을 명해, 협격을 합니다. 이에 죠우타로우의 군세의 사기는 완벽하게 꺽여 4만의 군세는 뿔뿔이 흩어지고 300기만이 패주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알게된 츠하다 무네치카는 싸우지 않고 에치고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 전투에서 첫 출진을 장식한 토모에 고젠은 대장 클래스를 7기나 죽여 요시나카를 기쁘게 합니다. 이로 인해 후의 구리카라토우케 전투에서 그녀에게 1천여기의 군사를 맡기기도 합니다.


 간신히 에치고에 도망간 죠우타로우 그러나 그의 아들은 요시나카 군에게 잡혀 버립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요시나카는 부하에게 그를 나주도록 명령합니다. 이에 감동했는지 죠우타로우는 그대로 에치고에서 물러납니다. 즉, 이 전투 한번으로 요시나카는 에치고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에츠젠, 엣츄의 무사들도 요시나카의 산하에들어갑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주목하고 있던 일본은 여기서, 키소노 요시나카에게 주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