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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무기는 어땠을까? 전국시대의 무기 개괄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무기는 어땠을까? 전국시대의 무기 개괄 전국시대 전투에서 주로 사용된 무기는 철포, 활, 쯔부테(礫:투석)입니다. 실제로 적을 사상시킨 무기의 비율은, 원거리용의 무기(활, 철포, 쯔부테)가 약 70%이고, 근거리용의 무기가 약 30%(칼, 창)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료를 조사 해, 통계로서 얻은 숫자입니다. 이와 같이 전투에서 주로 사용된 무기는, 원거리용의 무기였던 것이지요. 게이쵸 5년 8월 24일,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는 이세 쯔성(津城)을 공격했습니다. 26일 킷카와 가문에서는 공성전의 사상자를 서류에 정리했습니다. 그것에 따르면 전사자는 145명, 부상자는 173명에 이었으며, 철포로 인한 부상자 93명, 창에 의해 58명, 화살에 22명..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2) 전후처리 '쿠비짓켄'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12) 전후처리 '쿠비짓켄' 공양 전투의 승패는 운으로 정해집니다. 적을 토벌할 때도 있고 자신이 토벌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장은 적의 목에 예의를 다했습니다. 「고에쓰군기(甲越軍記)」에 의하면, 우에스기가에서는 대장이 적 대장의 목을 보는 것을 '목대면(首対面)'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투구와 갑옷을 지닌 무사의 목이면 '쿠비짓켄(首実検)', 아시가루의 목이면 '미시리(見知り)'라고 불렀습니다. 「중원고충군진문서(中原高忠軍陣聞書)」는 적의 대장의 목을 취했을 경우, 대장은 말의 궤짝의 좌측에 목을 걸어서 옮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목을 물로 씻어, 부패 방지를 위해 절단면에 소금을 바릅니다. 이것을 '소금절이기(塩漬け)'라고 말합니다. 목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1) 승패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11) 승패 승리 전쟁에 있어서 승리는 전투로 적군에게 다대한 손해를 주어 전투 의욕을 상실시켜, 항복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적이 항복하면 정치적 요구 예를 들어 영지의 할양등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투에서 적의 영주를 토벌할 수 있으면 결정적인 승리가 됩니다. 전투로 적군에게 준 피해가 작으면, 적은 전투 의욕을 잃지 않습니다. 항복을 했다고 해도, 과도한 요구를 들이대면 다시 전쟁이 일어 납니다. 반대로 적군에게 준 피해가 크면, 상당한 요구가 가능하게 되지요. 적은 전력과 전의를 상실하고 있어, 요구를 거절할 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투에 승리하면, 영주는 약탈의 허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축하연을 열었습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0) 성과 공성전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0) 성과 공성전 성 성은 고대 일본에서는 '키(き)'라고 불렸습니다. 그 후, '죠(じょ)'라고 불리다가, 전국시대 중반에 '시로(しろ)'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에는 방어를 위해서 해자(堀), 쯔키지(築地: 흙담), 토루(土塁: 흙 보루), 목책(尺木), 담(塀)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해자는 단순히 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기둥으로 보강해, 흙을 굳히고 무너지지 않게 했습니다. 해자를 팠을 때에 나오는 흙을 쌓아 올이면 그것을 토루라 부릅니다. 목책은 재목을 우물 정(井)자의 무늬로 짜 올리기 때문에, 사이에 틈새가 생깁니다. 공방 시에 그 틈새로 공격을 하거나 적을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 있었습니다. 쯔키지에는 돌이나 욱새를을 혼합한 적토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9) 야습,방화와 추격, 구원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9) 야습,방화와 추격, 구원 야습 야습은 적의 교란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참가하는 병사는 공명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적의 목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되고, 철퇴의 신호가 있으면 곧바로 퇴각해야 했지요. 또, 야습은 피아식별이 어렵기 때문에 같은편 사이 싸움을 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거기서 암호, 아이인이 중시되었습니다.(전국시대 암호) 또한 공성전 때,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공성 측을 야습하기도 했습니다. 야간 성공격에서는 적 아군 모두 화롯불을 피워, 새벽녘까지 공방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총성이나 말 전투(상대방에게 욕설을 퍼붇는 것)는 성방의 숙면을 방해해 사기를 저하시키기도 했습니다. 보통 적이 도착한 날의 밤, 전투를 끝내 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8) 군세와 진영, 전법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8) 군세와 전법, 전술 군세 일반적으로 전투는 대군이 유리합니다. 대군이 침공해 오면 알면, 위기감을 안아 배신하는 장수나 마을도 나옵니다. 즉, 적보다 많은 군사를 모으는 일은 전투에 승리하기 위한 최선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군은 그 인원수가 많음이 약점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작전 중,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공격 목표를 변경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대군이라면 말단에 전령이 닿을 때까지 시간이 걸려 아무래도 틈이 생깁니다. 따라서 적의 강습을 받으면 아군의 진영을 고쳐 세우는데 시간이 걸려 적군이 본진에 육박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적병은 대군과 싸우는 일로 심리적으로 단결해 격렬한 저항을 보였지요. 소수의 적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7) 전장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7) 전장 전장 야전의 경우, 전장에는 군을 전개 가능한 한만큼의 넓이가 필요합니다. 즉. 평원이나 강변이 전장에 적절한 것이지요. 세키가하라 전투나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평원에서, 아네가와 전투나 미미가와 전투는 강변이 전장이 되었습니다. 또, 비탈이나 고개를 행군 하는 도중에 전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나와데(畷)'이라고 하는 논두렁길이 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오키타 나와데 전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이와는 반대로 좁은 섬을 전장에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쓰쿠시마 전투는 대군의 행동을 봉하기 위해, 모리 모토나리는 이쓰쿠시마를 전장으로 선택했습니다. 성을 공격하는 경우에는 성의 입지에 의해 전장이 정해집니다. 성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산이나 강변에 쌓..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5) 정보(情報)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5) 정보(情報) 정찰 전투에 즈음해 정확한 정보 수집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영주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미모노(物見)에게 정찰을 명했습니다. 미모노의 보고에 의해 적군의 소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실제로 전장에 겨우 도착하는 무렵에는 적군이 이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때문에, 정보를 얻으면 적의 행동을 판별해 신속히 적진에 공격을 걸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적진의 위치도 정보 그대로의 장소인지, 아니면 이동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모노는 본대에 선행해 적의 위치, 수등을 보고합니다. 정확한 보고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무용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미모노가 되었습니다. 백명 규모의 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2) 이동(移動)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2) 이동(移動) 행군(行軍) 전국시대 길의 폭은 좁았습니다. 이것은 적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였지만, 자군의 출진 시에는 악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오다 노부나가는 길의 폭을 넓히고 길의 양옆으로 소나무나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고 합니다. 행군중에 만약 깃대가 접히면, 위쪽이 접히면 길하다고 생각하고, 아래가 접히면 흉이라 여겨졌습니다. 수례나 말을 끌고 가는 한중간에 말이 울면 길한 징조였고, 말의 등자에 다리를 올린 다음에 울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활을 겨드랑이에 끼운 상태로, 복대를 다시 묶으면 액막이가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후나바시(船橋: 선교) 군세가 큰 강을 건널 때, 후나바시를 걸쳐 놓기도 했었습니다. 후나바시와는 배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 개전(開戦)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1) 개전(開戦) 전투의 개전 정치 문제가 해결하지 않거나 다른 영주가 중재에 들어가, 쌍방이 교섭의 장에 서는 것을 합의하지 않는 이상 영주끼리의 전쟁을 멈추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교섭을 반복해도 타협하지 못하고, 사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드디어 개전의 봉화가 오릅니다. 많은 전쟁은 쌍방이 타협을 거부해, 자기의 권익을 지키려고 했을 때에 발생하지요. 이 때, 양쪽 모두 상대에 대한 증오가 소용돌이치고 있어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개전의 날자 정하기 전투의 날, 이유를 통지하는 것을 출진의 지령(陣触れ)이라고 합니다. 덴쇼 15년(1587년) 3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슈 정벌에 출진했고, 덴쇼 18년(1590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