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시대 썸네일형 리스트형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5) 정보(情報)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5) 정보(情報) 정찰 전투에 즈음해 정확한 정보 수집은 필수 불가결합니다. 영주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미모노(物見)에게 정찰을 명했습니다. 미모노의 보고에 의해 적군의 소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실제로 전장에 겨우 도착하는 무렵에는 적군이 이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때문에, 정보를 얻으면 적의 행동을 판별해 신속히 적진에 공격을 걸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적진의 위치도 정보 그대로의 장소인지, 아니면 이동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모노는 본대에 선행해 적의 위치, 수등을 보고합니다. 정확한 보고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무용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미모노가 되었습니다. 백명 규모의 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2) 이동(移動)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2) 이동(移動) 행군(行軍) 전국시대 길의 폭은 좁았습니다. 이것은 적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였지만, 자군의 출진 시에는 악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오다 노부나가는 길의 폭을 넓히고 길의 양옆으로 소나무나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고 합니다. 행군중에 만약 깃대가 접히면, 위쪽이 접히면 길하다고 생각하고, 아래가 접히면 흉이라 여겨졌습니다. 수례나 말을 끌고 가는 한중간에 말이 울면 길한 징조였고, 말의 등자에 다리를 올린 다음에 울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활을 겨드랑이에 끼운 상태로, 복대를 다시 묶으면 액막이가 된다고 여겨졌습니다. 후나바시(船橋: 선교) 군세가 큰 강을 건널 때, 후나바시를 걸쳐 놓기도 했었습니다. 후나바시와는 배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 개전(開戦)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1) 개전(開戦) 전투의 개전 정치 문제가 해결하지 않거나 다른 영주가 중재에 들어가, 쌍방이 교섭의 장에 서는 것을 합의하지 않는 이상 영주끼리의 전쟁을 멈추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교섭을 반복해도 타협하지 못하고, 사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드디어 개전의 봉화가 오릅니다. 많은 전쟁은 쌍방이 타협을 거부해, 자기의 권익을 지키려고 했을 때에 발생하지요. 이 때, 양쪽 모두 상대에 대한 증오가 소용돌이치고 있어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개전의 날자 정하기 전투의 날, 이유를 통지하는 것을 출진의 지령(陣触れ)이라고 합니다. 덴쇼 15년(1587년) 3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슈 정벌에 출진했고, 덴쇼 18년(1590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략은 어땠을까?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략은 어땠을까? 전국시대의 전략; 조략(調略), 첩략, 계략 아사쿠라 소테키는 「아사쿠라 소테키기」에서 '무사는 비록 개 같은 놈이라고 욕을 들어도, 단지 이기는 일만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전장에서만 노력해서는 안된다. 평소부터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전투시에 무리한 공격은 금물입니다. 영주의 군은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투에서 사상자가 나오면 마을의 생산력은 저하됩니다. 그 때문에, 영주는 장기간의 원정이나 공성전 등의 손해가 많은 전투를 싫어했습니다.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적대하는 영주를 멸했다고 해도 근처의 영주가 이 일을 알면, 지금이 호기 라는 듯이 침공을 할 것입니다. 병력에 여유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병역은 어땠을까?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병역은 어땠을까? 전국시대의 병역 전투에는 대량의 최하급 무사가 필요합니다. 영주는 가신에게 병역을 부과해, 아시가루를 모아 싸웠습니다. 가신은 영주로부터 영지가 안도되는 대신에, 전투시에 병사나 무기를 부담했지요. 이것은 율령제(律令制)의 용(庸: 현물 납입), 세(歳: 노동 납입)에 유래한 것입니다. 영주는 측량에 의해 가신의 영지의 수확량을 확인해, 병역을 정했습니다. 병역의 내용을 적은 서신을 출전장(着到状)이라 부릅니다. 영주는 가신에게 출전장을 보내, 그 이행을 요구했습니다. 병역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시가루를 모으는 것이 필요했는 데요. 그 결과, 무가끼리 아시가루의 소유권을 가지고 싸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컨데 다른 무가의 가신이 된 아시카루를 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 (3)전국무장들과 주술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3)전국무장들과 주술 이번 포스팅에서는 무장들이 전투에서 행했던 여러 점, 기도 들을 알아 보려고 합니다. 서약문(起請文) 스스로의 행동을 신불에 맹세해, 언동에 거짓이 없을 것을 문서에 쓰는 것으로 이것을 어길 경우에는 신불의 벌을 받는 일도 맹세했습니다. 맹세를 적은 것을 전서(前書), 신의 이름을 기록한 것을 신문(神文)이라고 합니다. 점상(占上) 전법을 점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거북이 등껍질을 구워, 균열로 신의 뜻을 점친 것에서 유래 했습니다. 이 균열을 형상화 해 '복(福)'의 글자가 만들어 졌고, 운세의 결과를 구두로 전하는 것에서 '점(占)'의 글자가 생겨났지요. 이윽고 대나무로 점치게 되어 '서(筮)'라는 글자가 태어났습니다. 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 (2)무장들의 군신신앙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2)무장들의 군신신앙 이번 포스팅에서는 무장들이 믿었던 여러 신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부동명왕(不動明王) 부동명왕은 대일여래, 시바신과 동일한 존재로 범어로 '아체라나타'라 합니다. '부동'이라는 뜻은 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뜻이지요. 마귀의 소리를 내치고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정신과 지혜에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부동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부처의 아래로 이끕니다. 그 얼굴은 굉장히 사나운데, 대일여래가 악귀를 굴복시킬 때의 형상이며, 시바신의 파괴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사문천(毘沙門天) 범어로 '바이슈라바나'라 합니다. 수미산 북방의 수호신입니다. 인도 신화의 신 쿠베이라가 불교에 들어오며 변용된 것으로 보입니다.쿠베이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 (1)무장들의 군신신앙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1)무장들의 군신신앙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의 가훈 「조운사전입한개조(早雲寺殿廿一箇条)」의 제 일조는 '제 일, 불신을 믿어 따를 것'입니다. 이세 모리토키는 신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모리토키는 이즈 미시마다이묘진(三島大明神)에 일정 기간 머물며 기도한 뒤에 정월에 큰 2 개의 삼(杉)을 한마리의 쥐가 먹고, 범으로 변화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태어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扇内上杉)가를 멸망시킬 것을 예견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이세 모리토키가 바로, 호조 소운입니다. 모리가의 군기에는 「頂礼正八幡大菩薩 南無九万八千軍神 二千八百四天童子十 帰命摩利支尊天王」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3) 전투에 참가한 여성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3) 전투에 참가한 여성 전투라고 해서 여성을 비껴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미망인이 당주가 되는 일도 있었기에, 남편이 사정이 있어 싸울 수 없는 경우, 아내는 대신에 지휘를 맡는 것이 인정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국시대에는 츠루히메나 묘우린니같이 아내가 성병을 지휘해 농성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농성전의 경우에 가까이 온 적병에게 총을 쏘거나 돌을 던지는 일은 그리 힘을 들이지 않는 것이기에 여성들이 동원되는 경우도 꽤나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사천왕인 혼다 타다카츠는 '전장에 처음 온 남성들은 피를 보고 구토를 하는데, 여성들은 침착하다.'라며 여성들이 오히려 더 용..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2)전쟁 뒤의 백성의 삶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2) 전쟁 뒤의 백성의 삶 약탈과 제부전 전투에 승리한 영주는 적지에서의 약탈을 용인했습니다. 부하들에게의 전쟁의 포상을 내리는 것이지요. 식료나 금전, 가구등 여러가지 물건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장에는 인신매매를 하는 상인이 있었기에, 잡은 포로들을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영지를 손에 넣은 영주는, 마을에 대한 지배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자군의 약탈에 대해 금제를 내, 마을의 안전을 보장했습니다. 하지만, 금제가 없는 마을에서 약탈을 하는 것은 적대 영주의 영지에의 공격이기에 용인되고 있었습니다. 또 비사문천의 화신, 우에스기 겐신 이야기를 하자면, 그가 자주하던 짓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약탈하는 아시가루(足軽)를 .. 더보기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5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