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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페이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 취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쇼군 취임 겐큐 3년(1192년) 7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 대장군(쇼군)에 임명되었습니다. 일본 무가를 통솔하는 것은 '쇼군'입니다. 이 쇼군은 '정이대장군'이라는 뜻으로, '정이'란 홋카이도를 정벌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정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시에 새로 생기는 직책이었습니다. 이 쇼군이 거주하는 곳이 '막부(幕府)'였습니다. 이 말은 중국 고전에서 '장군의 막영을 막부라고 한다'는 기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갠큐 3년(1192년) 7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쇼군에 취임한 것으로 이 날을 보통 '가마쿠라 막부'가 생겨난 날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생긴 날을 이(1) 이(1) 쿠(9) 니(2)라고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분지 5년(1189년) 9월 3일,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살해되어 영화를 자랑한 오슈 후지와라가 멸망 했습니다. 겐페이 쟁란에서 중립을 고수했던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영지는 원래 미나모토 가문의 땅이었기에, 요리토모는 이것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이에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요시츠네를 받아들여 요리토모를 견제하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뒤를 이은 후지와로노 야스히라는 그 평판이 갈리기는 합니다만,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결국 요시츠네를 죽이고 그 목을 요시토모에게 보냅니다. 하지만 이도 허무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토모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받아(야스히라 추토의 선지) 오슈 정벌을 시작합니다.(오..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분지 5년(1189) 6월 25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선지는 덴노 혹은 거기에 준하는 사람의 명령서입니다. 선지가 있으면 그 행위는 정통으로 관군으로 간주해지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죄를 추궁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추토의 선지를 유구합니다.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배하는 오슈는 원래 미나모토의 영지로 '후 삼년의 역'으로 빼았긴 땅입니다. 이제 그는 이 땅을 되찾으려 합니다. 교토로 들어와 타이라를 토벌한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요시츠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이를 받..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7) 코모로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7) 코모로가와 전투 분지 5년(1189년) 4월 3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요청을 받은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코로모가와(衣川) 저택을 덮쳐, 요시츠네를 할복시킨 '코모로가와 전투(衣川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공을 세워 단노우라 전투에서 타이라 가문을 물리쳤던 것도 잠시(단노우라 전투), 형 요시토모와의 불화로 쫓기는 몸이 된 요시츠네는 시고쿠와 큐슈를 지배에 넣어 형과 맞서려 하나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맙니다.(요시츠네 교토 탈출) 이에 그는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오슈 히라이즈미(平泉)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로 도망쳤습니다.(히데히라에게 의탁하다) 하지만 8개월 뒤 히데히라가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형 요시토모에게 쫓겨난 요시츠네가 오슈 히라이즈미(平泉)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로 도망쳤습니다. 헤이안 시대 오슈를 지배한 후지와라 가문은 중앙 정계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그 기반을 철저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3대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36세로 가독을 상속합니다. 토호쿠의 지배자가 된 그는 조정에서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제수되었긴 하지만 조정과는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풍부한 산물이 아닌 오슈에다 여러 교역으로 인해 부를 쌓아올린 히데히라는 오슈 17만기라고 하는 군사력과 교토와 비견할 만한 수도를 쌓아 올려, 독립국가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쇼안 4년(1174년), 황금으로 재산을 쌓은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위기, 호리카와 야습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위기, 호리카와 야습 분지 원년(1185년) 10월 11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명령을 받은 토사 호우슌(土佐坊昌)이, 로쿠죠호리카와(六条堀川)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의 저택을 야습했습니다. 단노우라에서 타이라를 물리쳐(단노우라 전투), 기세등등하게 형 요리토모가 있는 카마쿠라에 전승 보고로 향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형의 허가를 얻지 않은 채로 마음대로 조정으로부터 관위를 받은 것으로 형의 분노를 사, 코시고에(腰越)에서 금족 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교토로 돌아온 요시츠네는 '가마쿠라에 불만 있는 사람은 나에게 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교토로 들어가자 마자 이요노카미(伊予守)로 제수받았고,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4) 단노우라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4) 단노우라 전투 분지 원년(칸랴쿠 4년 1185년) 2월 19일은, 겐페이 쟁란의 절정인 '단노우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호겐의 난(호겐의 난)으로 인해 본격화된 타이라 가문의 독주는 지쇼 삼년의 정변(지쇼 삼년의 정변)으로 본격화 되었습니다. 천도하고, 자신의 자손을 덴노로 세우는 타이라의 폭주에 모치히토왕이 발한 선지가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호쿠리쿠에서는 키소노 요시나카가(이시바시산 전투), 가마쿠라에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군사를 일으킵니다.(요리토모 발기) 이에 타이라 가문은 그들을 무찌르려 하지만, 오히려 대패해 결국 키소노 요시나카는 입경합니다. 쇼군직까지 오르기는 하지만(요시나카 쇼군 등극) 고시라카와 법황과의 갈등으로 결국 요리토모에게 토..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3) 부채의 목표 이야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3) 부채의 목표 이야기 분지 원년(칸랴쿠 4년 1185년) 2월 19일은, 겐페이 쟁란 굴지의 전투 '야시마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타이라 가문 이야기(平家物語)」의 모두에서도 '기온조샤(祇園精舎)의 종 소리~'라 시작해, '알맞게 조금 멀리 퍼져 나가면...'이라고 시작하며 이 야시마 전투에서도 최대의 명장면, '부채의 목표(扇の的)'의 부분을 써 두고 있습니다.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가들을 통솔하는 겐지의 동량이기에, 조직의 견고함을 위해 자신의 허락 없이 관위를 받거나 승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그와 상의를 하지 않고 독단으로 요시츠네에게 관위를 제수해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동생이라고 봐주면 기강이 헤이해 지지요..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분지 원년(1185년) 2월 16일 미나모토군의 대장에 복귀해, 타이라 토벌을 목표로 하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불과 하룻밤에 배로 바다를 건너, 타이라가 진을 치는 야시마로 향했습니다. 히요도리고에 기습(히요도리고에 기습)을 성공시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가 교토에 개선 한 것은, 전투로부터 2일 후의 캰라쿠 3년(1184년) 2월 9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교토에서는 이치죠다니 전투의 결과가 도착해 있었는지 교토에서 들어온 키소노 요시나카가 영화가 다한 타이라에 승리했을 때의 대환성에 이은 환성이 울려 퍼집니다. 이 때, 요시츠네은 아직 26세입니다. 자신을 우러러보는 교토 백성들에게 우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것이 '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