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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게임 속 역사이야기; 쇼군 토탈워2 카와코에 야전 게임 속 역사이야기; 쇼군 토탈워2카와코에 야전 쇼군 토탈워2에는 'Historical Battle'이라 해서 역사적인 전투들을 재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전투들을 포스팅 해보려 합니다. 카와코에 야전에 대해 따로 포스팅 해 놓은 것은 아래의 링크를 눌러 주세요. 일본 전국시대; 쿠보 괴멸하다 카와코에 야전 처음에는 간단히 카와코에 야전에 대해서 설명이 쓰여 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와코에 야전(1545년)은 호조 가문이 빠른 속도와 은밀성을 위해 무거운 갑옷을 벗고, 밤에 포위해 공격해 오는 우에스기 가문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전투이다. 그 다음에서는 이례 그렇듯이 각 진영의 장수들에 대해 보여주는 로딩 화면입니다. 호조 측에서는 호조 츠나시게와 원군으로 호조 우지야스가, 공격하는 우에..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막부군의 항복으로 아소 하루토키 등이 처형당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막부군의 항복으로 아소 하루토키 등이 처형당하다 겐코 3년(1333년) 7월 9일, 아소 하루토키(阿蘇治時), 오사라기 타카나오(大仏高直) 등 호조의 유명한 가신이나 중신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호조 다카토키 일족 멸망의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일련의 겐무의 신정이 개시됩니다. 가마쿠라막부 정권에서 그 세력을 자랑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일족은 이슬과 함께 사라졌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는 즉시 호키 센죠우산(船上山)을 출발해,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그는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로쿠하라탄다이가 함락된 시점에서, 코우곤덴노(光厳天皇)를 내쫓아, 사실상 정권을 탈취..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요시타다 패배, 코테사시가하라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요시타다 패배, 코테사시가하라 전투 겐코 3년(1333년) 5월 11일, 가마쿠라 막부군에서 고다이고덴노 측에 붙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코테사시가하라(小手指原)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고다이고덴노가 아쿠도우(悪党)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조력을 얻어 가사기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겐코의 변을 발발시키는 것도 실패에 끝나(겐코의 변), 겐코 원년(1331년) 아카사카성(赤坂城)에서 분전 하고 있던 마사시게가 성을 탈출하고, 고다이고덴노가 오키로 도망친 것이 겐코2년(1332년)의 일입니다. 8개월 후 겐코의 변 때 가사기산에서 탈출하고 있던 고다이고덴노의 황태자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재기를 도모하고 요시노산에 들어가, 전국을 향해 막부 토벌의 영지를 발하자, 행방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갑작스런 출세'를 온 몸으로 체현한 가문이 둘 있으니, 바로 사이토 가문(사이토 가문)과 후 호조 가문입니다. 호조 가문의 성립, 호조 소운의 활약 사실 일본사에서 호조 가문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전기의 호조 가문은 덴노와 권력투쟁을 했을 정도로 강성한 힘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호조가문은 전기의 호조가문과 비교하기 위해 '후호조 가문' 이라고 부릅니다. 호조 가문을 일으킨 것은 이세 신쿠로 나가우지(伊勢新九郎長氏)로, 후에 '호조 소운'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는 스스로를 '호조 소운'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호조 소운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케다와 호조, 후카자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케다와 호조, 후카자와성 공방전 겐키2년(1571년) 다케다와 호조가 후카자와성(深沢城)의 소유권때문에 격돌한 '후카자와성 공방전(深沢城攻防戦)'이 끝났습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물리치고, 스루가를 손에 넣은 다케다 신겐에게 있어서 이 후카자와성은 이웃나라 사가미와 국경을 접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것은 사가미를 본거지로 하는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있어서도 같았지요. 어떻게든, 이 땅을 손에 넣고 싶은 우지마사는 신겐의 칸바라성(蒲原城)을 점령하려던 사타토우케(薩埵峠)에서 큰 피해를 입은 에이로쿠 12년(1569년) 이후에도 가끔 후카자와성에 출병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을 지키는 것은 다케다측의 코마이 마사나오(駒井)였습니다. 겐키 원년(1570년) 우지마사는 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케다가와 호조가의 대결; 미마세 고개의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케다가와 호조가의 대결; 미마세 고개의 전투 에이로쿠 12년(1569년) 귀국 중의 다케다 신겐의 군을 호조 군이 미마세고개에서 기습한 '미마세고개의 전투(三増峠の戦い)'가 있었습니다. 키요스 동맹을 깨고 이마가와가로 쳐들어간 신겐은 스루가를 얻게 됩니다.(이마가와관 공방전) 당연히 이 신겐의 행동을 본 사가미의 호조가는 경계의 태도를 드러내고 군사를 움직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충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해 에이로쿠 12년(1569년), 신겐은 이제 사가미에 원정을 개시합니다. 신겐은 가이에서 출진해, 시나노로 우회해, 우에노를 거치고, 무사시로 이동해 거기서 사가미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후호조의 지성인 하치가타성(鉢形城), 타키야마성(滝山城)을 견제하며 남쪽으로 이동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에이로쿠7년(1564년) 호조 우지야스군이 에도강을 넘어 다이간(対岸)에 포진 하는 사토미 요시히로(里見義弘)군에 기습공격을 개시한 '제2차 코우노다이 전투'가 있었습니다. 호조가는 텐분 15년(1546년)의 카와코에야전(카와코에 전투)에서 승리해 쿠보나 관동 관령이라고 하는 구세력을 이름만 남은 상태로 한 뒤 관동 북부에 세력을 늘려서 갑니다. 사토미가도 호조와 일촉즉발인 상태에서 관동에 세력을 늘릴 찬스를 계속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1차 코우노다이 전투(1차 코우노다이 전투)로부터 약 30년이 흘러 호조와 사토미 각각의 당주가 후대로 이어져 다시, 이 땅에서 자웅을 결정할 시기가 옵니다. 이번 전투에는 호조와 사토미 만이 아니고 여..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2차 코우노다이 전투의 서막이 밝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제2차 코우노다이 전투의 서막이 밝다 에이로쿠4년(1561년) 안보의 사토미 요시히로가 수군을 인솔해 호조의 사가미 미우라(三浦)에 쳐들어갔습니다. 안보의 사토미가는 키요카즈 겐지를 이어받는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의 아들 닛타 도리슌(新田義俊)이, 우에노의 사토미에 이주해, 토지의 이름을 취해 사토미를 자칭해 시작합니다. 그 자손이 안보의 수호를 명령받고, 11대 당주 사토미 요시자네(里見義実)가 안보의 평정에 성공해 안보사토미(安房里見)라 불리게 됩니다. 그 후, 안보시라하마성(安房白浜城)을 거성으로 해, 세력 확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6대후 즉, 17대 당주가 되는 것이 오늘의 주역 요시히로의 아버지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입니다. 그는 사실 직계 즉, 본가의 혈통..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실책? 오다와라성 논공행상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의 실책? 오다와라성 논공행상 덴쇼 18년(1590년) 7월 13일, 오다와라 성에 입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논공행상이란 공훈에 따라 상을 주는 일 입니다. 즉, 오다와라 정벌에 의해 멸망 한 호조 가문의 영지(호조 멸망)를 어떻게 할 것인지, 누구에게 새 영지를 줄 것인지 등이 논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토카이(미카와, 시나노, 가이, 도토미, 스루가 등)에 대신해, 원래 호조의 영지였던 관동 일대, 이른바 간핫슈(関八州: 관동 팔주)가 주어집니다. 물론, 이 은상을 마음 속에서야 오히려 벌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도, 은상은 즉 명령이므로 거부하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때, 이에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가 멸망, 오다와라성 함락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호조가 멸망, 오다와라성 함락되다 덴쇼 18년(1590년) 7월 5일, 오다와라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항복을 신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전국 다이묘 호조가가 멸망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는 이제 관동의 호조를 공격합니다. 4월 3일, 오다와라성을 포위해 하룻밤에 이시카키산성을 지은 히데요시(오다와라성 포위)는 이제 장수들을 시켜 여러 지성들을 공격합니다.(오시성,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