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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가 멸망, 오다와라성 함락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가 멸망, 오다와라성 함락되다



 덴쇼 18년(1590년) 7월 5일, 오다와라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 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항복을 신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전국 다이묘 호조가가 멸망했습니다.



오다와라성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는 이제 관동의 호조를 공격합니다. 4월 3일, 오다와라성을 포위해 하룻밤에 이시카키산성을 지은 히데요시(오다와라성 포위)는 이제 장수들을 시켜 여러 지성들을 공격합니다.(오시성, 하치오지성 공방전)


 오다와라성은 호조 소운이 손수 지은 굉장한 성입니다.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성 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를 강고한 성벽에서 둘러싼다고 하는 유럽의 성곽도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운 만이 아니고, 2대 우지쓰나(氏綱), 3대 우지야쓰(氏康) 등에 의해 보완되어 훨씬 더 대단해 졌습니다. 가이의 범 다케다도,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도 이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호조측은 방어선이 찢어졌더라도, 이 성만 지키면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을이 성 안에 있기에, 보급이 끝겨도 군량을 보급할 수 있었지요. 



강고한 히데요시의 포위



 호조는 이렇게 성안에 틀여박혀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공격하던 측이 제풀에 지쳐 돌아가도, 성 안에 마을이 있기에 실질적인 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전의 적들과는 달랐습니다. 후방을 걱정해야 했던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과는 다르게그는 이미 천하를 거의 통일해 남은 것은 호조의 관동과 마사무네의 토호쿠 뿐이었지요.  


 게다가 '공성전에 약했던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겐신과 다르게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가장 공성전에 뛰어난 명장이었습니다. 돗토리성 공방전 때는 '수도의 쌀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쌀을 매점해 승리를 거두고, 타카마츠성은 수몰시켜 점령합니다. 이번에 그는 오다와라성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모두 차단해 버립니다. 게다가 각지의 20만 석의 쌀을 매점하는데 그치지 않고, 황금 백량으로 이세에서 스루가에 걸치는 토카이 여러 나라의 쌀마저 매점합니다.



호조 소운에서, 100년에 걸친 호조가문은 여기서 멸망합니다



 아무리 성안에 마을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보급이 죄다 끊기고, 관동의 각 성이 점령당해 버려서야 이건 농성이 아니고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조는 하루가 다르게 회의를 열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지요. 그러는 와중에 전황을 읽은 한 명, 한 명이 히데요시측에 항복해 사기는 갈수록 내려갔습니다. 결국 7월 11일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가 항복하고 우지마사와 그의 동생 우지노리(氏規)는 할복하고, 당주 우지나오는 코노야마에 추방되어 호조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오슈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