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가이히메와 떠있는 오시성, 히데요시군을 무찌르다
덴쇼 18년(1590년) 6월 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호조의 무사시 오시성(忍城) 공략을 위해 제방을 구축했습니다.
천하를 눈 앞에 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지막 거물인 호조를 공격하기 위해 개시한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 정벌)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가 있는 오다와라성을 22만의 대군으로 포위한 것이, 덴쇼 18년(1590년) 4월 3일이었습니다.(오다와라성 포위) 한편, 호조의 군세는 5만 6천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군세가 오다와라성에 농성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관동 각지에 있는 호조의 지성에 군세가 남아 있었다는 것이지요. 여러 성주가 군을 인솔해 오다와라성의 농성에 참전하고 있지만, 그의 부재 중을 맡는 성병이 지성에 남아 있었습니다.
공격하는 히데요시는, 그 지성도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히데요시는 스스로가 인솔하는 본대와 바다에서 오다와라성을 쿠기 수군과는 별도로, 지성을 공격하는 별동대도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호쿠리쿠 방면에서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한 카가의 마에다 토시이에와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시나노에서 합류해 나카센도우(中山道)를 진공해 4월 22일에는, 호조의 중신 다이도우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의 마츠다이성(松井田城)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세로 우에노의 대부분을 제압한 그들이 무사시에 도달하는 무렵에는, 오다와라성 포위를 돕고 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나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등도 그들과 합류시켜,지성의 공략에 임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4월 22일에는 에도성(江戸城)이 함락 되어 그 후, 카와코에성(河越城), 마츠야마성(松山城)이 차례로 점령당했습니다. 5월 19일부터 행해진 무사시 이와무라성(岩村城) 공격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 혼다 다다카츠나 토리이 모도타다(鳥居元忠)등도 더해져, 압도적인 수의 차이로 5월 22일에 점령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호조 우지쿠니(北条氏邦)이 깃들이는 하치가타성(鉢形城)으로 진군합니다. 정확히 같은 시기,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이시다 미쓰나리가 2만 3천의 대군을 이끌고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오시성을 공격했습니다.
오시성의 모습
6월 1일에 오시성을 포위한 미쓰나리는 늪 지대에 지어진 오시성에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쳐들어가려고 하면 늪 지대에 발이 묶여 쉽게 진군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시성은 늪을 자연의 해자로 이용한 구조에, 성의 중심 건물이나 성의 외곽등 주요한 건물들이 다리로 연결되고 있어 명장으로 이름높은 우에스기 겐신도 두 번에 걸쳐 이 성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만, 함락시키지 못한 철벽의 성이었습니다. 이 때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는 오다와라성의 농성에 참전하고 있어, 오시성에 남아 있는 것은 부재중을 맡는 불과 3천명 정도의 성병들 이었습니다. 게다가 성내의 대장은 우지나가의 딸로, 불과 19세인 가이히메(가이히메)였습니다.
결국, 공격하다 지친 미쓰나리는 주군인 히데요시의 주특기인 수공을 가하기로 합니다. 덴쇼 18년(1590년) 6월 9일, 총 28 km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올려 아라카와(荒川)와 토네가와(利根川)의 두 강에서 물을 끌어 들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미쓰나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장마 전입니다. 수공에 비가 내린 다면야, 공격받은 측의 고립하는 속도는 빨라지겠지요. 하지만 이 해는, 비가 지나치게 많이 왔습니다. 연일, 관동 특유의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6월 16일에는 오히려 제방이 파괴되어, 근처에 홍수가 일어나 반대로 공격하는 입장의 미쓰나리군에 많은 희생자가 나와 버립니다. 게다가, 오시성 주변의 늪은 한층 더 심해져 보다 공격하기 어려워 되어 버렸습니다. 물에 뜨면서도, 철벽의 방비를 자랑한 오시성을 누구인가 '떠있는 오시성(忍の浮城)'이라고 불러, 어느덧 미쓰나리군에는 체념의 공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범람한 물에 잠긴 오시성
먼저 쓴 별동대는, 6월 14일에 하치가타성을 점령해, 6월 23일에는, 하치오지성(八王子城)도 함락 시킵니다. 하지만 이 오시성은, 1개월 가까이의 시간을 들여도 결국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7월 5일,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이 개성 되어 호조는 멸망 하였습니다만, 그 소식이 성에 닿는 마지막 날까지 오시성은 함락되지 않았니다. 즉, 이 오시성은 오다와라 정벌로 유일하게 히데요시가 떨어뜨릴 수 없었던 성인 것입니다. 게다가 상기의 수공을 지시한 것이 히데요시라는 설도 있고, 성을 지킨 것이 어린 공주, 가이히메였던 일로 더 드라마틱했던 공성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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