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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실책? 오다와라성 논공행상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실책? 오다와라성 논공행상



 덴쇼 18년(1590년) 7월 13일, 오다와라 성에 입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논공행상이란 공훈에 따라 상을 주는 일 입니다. 즉, 오다와라 정벌에 의해 멸망 한 호조 가문의 영지(호조 멸망)를 어떻게 할 것인지, 누구에게 새 영지를 줄 것인지 등이 논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토카이(미카와, 시나노, 가이, 도토미, 스루가 등)에 대신해, 원래 호조의 영지였던 관동 일대, 이른바 간핫슈(関八州: 관동 팔주)가 주어집니다. 물론, 이 은상을 마음 속에서야 오히려 벌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도, 은상은 즉 명령이므로 거부하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때, 이에야스가 관동에 가는 대신에, 원래 이에야스의 영지를 하사받은 오다 노부오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개역 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이 이에야스의 관동으로의 이동은 결과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실책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농민에서 부터 출세 가도를 전속력으로 달리며 실책을 거의 범하지 않은 히데요시의 인생에서, 이에야스를 관동 다이묘로 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수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나름대로, 당시의 정세를 생각하고, 거리낌이 있는 이야에스를 교토에서 멀고 통치가 힘든 관동을 맡긴 것일지도 모릅니다.



간핫슈(관동 팔주)



 간핫슈란, 관동 8개국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히타치(常陸)에게는 사타케(佐竹) 가문, 안보(安房)에는 사토미(里見) 가문, 시모쓰게(下野)에는 우츠노미야(宇都宮) 가문이나 나스(那須) 가문 등 등이 있었습니다. 즉 ,  전국 다이묘가 군웅할거 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호조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것은 4개국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 호조를 멸망 시킨 도요토미 세력에 현지가 호의를 가지고 받아 들일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그 후 이에야스가 거성으로 삼을 곳까지 지정했었다고 합니다. 아직 오다와라성이 함락되기 전에, 히데요시는 이야에스에게 오다와라성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호조를 멸망시킨 뒤에 이 성을 주면 여기를 거성으로 삼을 것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러면 안 되네. 이 오다와라성은 군사적 요지로, 위험한 곳이네 혈기왕성한 가신에게 이 성을 맡기고 자네는 에도에 자리를 잡게."


 이 이야기로 이야에스는 후에 에도성을 거성으로 삼았다고 합니다만, 당시의 에도는 작은 어촌이 있는 시골입니다. 하지만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야에스는 히데요시의 명을 들어 순순히 에도로 향합니다. 이때 미래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일본의 관동은 재밌게도 계속해서 중앙의 세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곳입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将門) 때부터 가마쿠라 쿠보, 또 호리코시 쿠보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운 호조 가문역시 반기를 들어 독립국가가 된 것이지요. 도쿠가와 역시 이 역사를 곱씹으며 언젠가 도요토미 가문을 천하인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자신이 천하를 잡겠다고 결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