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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조슈 동란(2) 스후 마사노스케 할복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조슈 동란(2) 스후 마사노스케 할복 겐지 원년(1864년) 9월 26일, 조슈번사 스후 마사노스케가 목을 베어 자살했습니다. 분큐 3년 연(1863년) 8월 18일 존왕양이파의 중심이었던 조슈번이 공무합체파에 의해 조정에서 제외돼 버립니다(8월 18일의 변) 이로서 조슈번은 역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 조정과 막부의 처사해 조슈번이 저항한 것이 긴몬의 변입니다.(긴몬의 변) 이후, 덴노는 공식적으로 조슈를 역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렇기에, 이제 조슈 정벌에 참여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에 따라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슈번도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겐지 원년(1864년) 9월 25일 행해진 어전회의에서 분타는 상대 의견을 설파해 '막부에 항전'..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조슈 동란(1) 이노우에 분타 습격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조슈 동란(1) 이노우에 분타 습격 겐지 원년(1864년) 9월 25일, 조슈번에서 어전회의를 끝낸 이노우에 분타(御前会議)가 반대파에 습격되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노우에 분타는 후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입니다.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와 얽힌 오쇼쿠 사건(汚職事件), 로쿠메이관(鹿鳴館)의 호화 삼매경이라고 해, 어딘지 모르게 좋은 인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함께 조슈번의 일익을 담당해,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을 넘어 유신에 공헌한 사람입니다. 후에 오쇼쿠 사건으로 실각해도, 다시 정부에 귀환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뇌물과 이권으로 사욕을 채웠다고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정이 많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젊은 무렵에는 타카스기 신사쿠들과 함께, 영국 공사관에 불을..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시모노세키 전쟁(3) 시모노세키의 전후 처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시모노세키 전쟁(3) 시모노세키의 전후 처리 겐지 원년(1864년) 8월 8일 시코쿠 연합 함대의 공격에 의해, 시모노세키에 있던 조슈번의 포대가 괴멸 되어, 시모노세키 전쟁이 종료했습니다.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의 내항으로,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시킨 막부와 그런 막부에 불만을 가지는 양이파는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와 결합해 '존왕양이파'가 됩니다. 그 존왕양이파의 대표격이 바로 조슈번이었습니다. 그런 조슈번이 분큐 3년년(1863년)의 5월에, 간몬 해협에 정박 중이던 미국 상선에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시모노세키 전쟁 발발), 해협을 지나는 외국선에 차례차례로 발포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의 4개국의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습격합니다. 이를..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간몬의 변, 덴노산 17 열사의 할복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간몬의 변, 덴노산 17 열사의 할복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8월 18일의 정변으로 내려진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조슈번이 고쇼로 밀려 들었기 때문에, 사츠마번이나 아이즈번과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긴몬의 변(禁門の変)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로 덴노산에서 17명의 열사가 할복했습니다. 덴노산은 전국시대에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죽인 야마자키의 전투가 일어난 곳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웅을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을 '덴노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개항기에도 덴노산에서 중요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에도막부 말기,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건 조슈번과 분큐 3년 8월 공무합체를 꿈꾸는 아이즈, 사츠마번의 협격에, 조슈번은 교토에서..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조슈번의 상경, 긴몬의 변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조슈번의 상경, 긴몬의 변 발발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8월 18일의 정변으로 내려진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조슈번이 고쇼로 밀려 들었기 때문에, 사츠마번이나 아이즈번과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긴몬의 변(禁門の変)입니다. 페리의 내항의 압력에 개국을 한 막부와 어디까지나 양이를 결행하고 싶은 조정과, 존왕양이론의 선봉을 선 것이 조슈번입니다. 조정 내의 양이파의 신뢰를 받아 고쇼에도 세력을 폈던 조슈번이었지만,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태는 일변합니다.(8월 18일의 정변) 공무합체파의 공경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 양이파인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조슈번은 고쇼에서 내쫓아져 정계에서도 일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은밀하게 공무합체파의 중심 인물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에 의해 이케다야 사건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에 의해 이케다야 사건 발발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신선조가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에 모인 존왕양이파 지사를 급습한 이케다야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존왕양이(尊王攘夷)나 공무합체(公武合体)로 두 동강이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조정 내에서도 역시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공무합체파인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中川宮朝彦親王)은 공무합체파인 아이즈번, 사츠마번과 협력해, 존왕양이파의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7명을 고쇼에서 내쫓아, 교토에서의 퇴거를 명합니다. 이것이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입니다.(8월 18일의 정변) 교토에 있을 곳이 없어진 사네토미 등은 존왕양이파의 조슈번을 의지해 교토에서 탈출합니다. 이것으로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분큐 3년(1863년) 9월 28일, 제1회 사츠에이센쇼 평화 회담이,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열렸습니다. 분큐 2년년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요구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로 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츠마번을 다스리던 시마즈 하사미츠도, 아들인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도 범인을 인도할 생각도, 배상금도 건네줄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7월 1일에는, 수박 판매 결사대를 파견해 전투 태세에 들어갑니다.(수팍판매 결사대) 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 사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3일간 걸쳤지만, 애초에 교섭이 주 목적으로 별다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영국측..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존왕양이파 일소되다, 8월 18일의 정변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존왕양이파 일소되다, 8월 18일의 정변 분큐 3년 연(1863년) 8월 18일, 사츠마, 아이즈의 양번이, 존왕양이파의 문신을 교토로부터 추방한 8월 18일의 정변이 발발했습니다. 그 페리 내항 이래 막부의 소극적인 외교로인해, 양이파는 덴노에 기대를 가져, 존왕양이파라고 하는 파벌이 됩니다. 한편, 사바쿠파(佐幕派)의 대표격인 다이로우인 이이 나오스케는 그런 존왕양이파를 어렵게 탄압하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결행합니다. 하지만 그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의 변)에 의해서 암살되어 막부의 권위는 쇠퇴해 버렸습니다. 거기서 막부는 조정과 합해 관계를 수복하는 것과 동시에 존왕양이파를 억압해 국내를 하나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공무합체'입.. 더보기
일본 유시니대 역사편; 덴츄구미의 멸망, 요시무라 도라타로 할복 일본 유시니대 역사편;덴츄구미의 멸망, 요시무라 도라타로 할복 분큐 3년 연(1863년) 9월 27일,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 지사로, 덴추구미(天誅組)를 조직했던 요시무라 도라타로(吉村寅太郎)가 할복 했습니다. 텐포우 8년(1837년), 토사에서 촌장의 아이로 태어난 요시무라 도라타로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과 동시에, 학문이나 검술에 매진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검술의 스승인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의 영향으로 서서히, 양이 사상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24세 때, 한페이타가 결성한 토사 킨노우도우(勤皇党)에 참가 합니다. 다음 해, 한페이타의 하인이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만나, 그 사상에 감화 되어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되는 것을 결의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3) 사츠에이센쇼 전쟁 종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쇼 전쟁(3) 사츠에이센쇼 전쟁 종결 분큐 3년(1863년) 7월 4일, 지난 7월 2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종결했습니다. 분큐 3년(1863년) 7월 4일에,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만에서 자취을 감춘 일로 사츠에이센쇼 전쟁은 종결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의 포격에 의해서, 포대를 소실하는 피해를 당하긴 한 사츠마 번이었지만, 사망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보급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돌아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에 존왕양이파와 그 기치를 든 덴노를 위시한 조정은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조정은 7월에 사츠마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칙서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2일에 영국함대와의 항쟁의 이야기를 들은 덴노는 기뻐하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