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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3) 사츠에이센쇼 전쟁 종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3) 사츠에이센쇼 전쟁 종결



분큐 3년(1863년) 7월 4일, 지난 7월 2일부터 3일간에 걸쳐 전개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종결했습니다. 


 분큐 3년(1863년) 7월 4일에,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만에서 자취을 감춘 일로 사츠에이센쇼 전쟁은 종결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의 포격에 의해서, 포대를 소실하는 피해를 당하긴 한 사츠마 번이었지만, 사망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게다가 영국이 보급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돌아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에 존왕양이파와 그 기치를 든 덴노를 위시한 조정은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조정은 7월에 사츠마 번주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에게 칙서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2일에 영국함대와의 항쟁의 이야기를 들은 덴노는 기뻐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일본의 무위를 전 세계에 보이도록 노력해 주세요'라는 느낌의 칙서입니다.



시마즈 히사미츠



 페리 내항의 무렵(페리 내항), 공포에 떨던 공가가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에게 '미개인(외국인)들은 숫처녀의 생혈을 마셔, 그 고기를 먹었습니다' 등의 거짓 소문을 퍼트려 덴노는 외국인들은 그냥 싫어하게 되어, '덴노의 마음에 따르는 것'은 즉 '양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의 청의 모습을 알고 있던 막부는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고 합니다. 안세이 5년(1858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맺은 뒤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의해 많은 외국인이 외국인 거류지에 살게 됩니다. 존왕양이파가 보면 이것은 '일본을 더럽히는 일'이기에, 외국인 암살이나 습격등의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게다가 다이로우인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 밖에서 암살되는(사쿠라다몬 외의 변) 무렵에 전후 해서는, 존왕양이파는'천주(天誅)'라고 칭해 요인의 암살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제14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가 결혼하는 '공무합체'를 통해 혼란을 수습하려 합니다. 그러나, 분큐 3년(1863년) 무렵 조정이 조슈의 존양 급진파 좌지우지 되어, 이미 코우메이덴노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덴노에 편에 섰던 것이 시마즈 히사미츠입니다. 그는아들이 사츠마 번주이긴 했지만, 아직 젊은 사츠마번의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분큐 2년년(1862년)의 상경 시에는 '교토에 체재해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를 진압하라'고 하는 장사 진정(壮士鎮静)의 칙명도 받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존왕양이에 앞선 번사를 스스로가 말살하는 데라다야 사건(데라다야 사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히사미츠가 태도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계기가, 이 에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과 이 세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결과적으로 영국 함대를 쫓아버렸기 때문에, 존양 급진파의 문신들은 '공무합체파이고, 강행인 양이에 반대하고 있었던 하사미츠까지 외국선에 포격 해 양이 실행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라며 반겼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덴노의 칙서 이것은 이미 덴노가 내린 것이라기 보다는 급진파들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미 조정에서 덴노가 실권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마즈 하사미츠는 존왕양이의 원래 자세인 '덴노의 마음을 따른다'는 자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결국, 사츠마번은 아이즈번과 짜고 쿠데타를 계획해 존양 급진파를 내쫓으려 합니다. 이것이 8월 18일의 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