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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분큐 3년(1863년) 7월 1일, 영국 공사 대리 닐이,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영국 함대를 이끄는 쿠퍼 제독에게 세츠에이센쇼 전쟁을 명령했습니다.


 전년 8월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페리의 외국 함선 내항(페리의 내항)에 의해, 길게 닫고 있던 쇄국의 문을 연 막부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일으켜, 개국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 밖의 변)로 살해된 뒤, 관동 일대에서는 존왕양이파에 의한 외국인 살상 사건이나, 외국 공사관 습격 사건등이 다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일어난 것이 나마무기 사건입니다.(나마무기 사건)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하고 있던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이 가나가와숙소 가까이의 나마무기촌(生麦村)에 도달했을 때, 그 행렬을 무시하고 지나간 4명의 영국인을 사츠마 번사가 '무례하다'며 베어 버려 1명 리차드슨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사츠마번에 등장한 배들


 

 막부는 이에 대해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만, 사츠마번은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영국 공사 존 닐은 사츠마번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함대를 가고시마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 함대를 이끄는 것은 취임한지 얼마 안 되는 아구스투스 쿠퍼 소위였습니다. 분큐 3년(1863년) 6월 27일 기슭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영국 함대에게 사츠마 번의 이치지 마사하루(伊地知正治) 등 4명을 태운 작은 배가 등장합니다. 닐은 그 4명에게 영국의 요구서를 전합니다. 거기에는 전부터 요구하고 있던 배상금 2만 5000 파운드의 지불과 나마무기 사건의 실행범의 처형의 일을 요구해, 30시간 이내에 그 회답을 제시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다시 기함인 유리아라스호를 방문해, 이번에는 '교섭하기 위해서'라며, 닐과 쿠퍼의 상륙을 요청합니다만, 당연히 영국측은 거부합니다.


 그날 저녁, 영국 함대에 8척의 작은 배가 다가왔습니다. 그 배들에는 100명 남짓의 사람이 분승 해, 상인의 모습을 하고, 수박을 가져 '수박을 사라'며 강권합니다. 게다가 그 중의 면면이 사츠마 번주의 친척이라 자칭해 '회답서를 지니고 있다'해 40명의 승선을 허락합니다.  그 중에는 나마무기 사건에서 최초에 영국인을 벤 나라하라 키자에몬(奈良原喜左衛門)과 리차드슨을 찌른 아리무라 타케츠구(有村武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닐과 쿠퍼를 살해하고 유리아라스호 이하 영국 함대를 탈취하는 명령을 받은 '수박 판매 결사대(西瓜売り決死隊)'였습니다.



사츠마측의 협상단



 아직 이를 모르는 닐과 쿠퍼는 번주의 친척이라 자칭한 마치다 로쿠로우자에몬(町田六郎左衛門)과 코우카 키조우(江夏喜蔵), 시키토우 쿠로우(志岐藤九郎)의 3명을 함장실에 불러 넣었습니다. 그들은 회답서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뭔가 초초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호는 오지 않고, 갑자기 작은 배가 다가와 '중지! 중지!'라며 소리치자 갑작스레 도망쳤습니다. 영국측은 뻥쪄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츠마 히사미츠는 원래 이 계획을 내켜하지 않았지만, 오오쿠보 이치조(大久保一蔵)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츠마번은 정식적 회답서를 보내지만, 영국측의 요구를 무시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