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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타카스키 신사쿠의 키헤이타이 결성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타카스키 신사쿠의 키헤이타이 결성



 분큐 3년(1863년) 6월 7일에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키헤이타이(奇兵隊)을 결성했습니다. 



타카스기 신사쿠



 일본 메이지 유신시대의 지사들은 매우 젊습니다. 타카스기 신사쿠가 키헤이타이를 결성한 것은 25세 때, 그리고 그 간부로 발탁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23세였습니다. 함께 배운 쇼오카 손주크(1松下村塾)를 열고 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이 4년전인 안세이 6년(1859년)에 사형 되었습니다만, 그 때의 연령은 30세입니다. 그리고, 게이오 2년(1866년)에 제2차 조슈정벌 전, 삿초 동맹(薩長同盟) 이뤄지게 됩니다만, 그 때의 중심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당시 37세였습니다. 그에 대하는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는 33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와 사카모토 류마(坂本龍馬)가 28세와 31세였습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때의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37세, 곤도 이사미(近藤勇) 33세,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 32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30세,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29세, 메이지덴노는 15세에 불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지사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츠마의 '고쇼죠(小姓組)'라고 불리던 시동급의 신분이 낮은 무사이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 보다 낮은 '고모노(小物)'라고 불리 있었습니다. 상급의 무사는 번의 규칙에 구속되어 자유롭게 활약할 수 없는데다가 가진 것이 많았기에 함부로  모험을 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낮은 신분의 무사들은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자본의 문제입니다. 거의 무직이기에,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같이 해운업을 하거나, 사이고와 오오쿠보는 막부가 주조한 동전을 몰래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카스기 신사쿠는 이런 돈의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50석을 가지는 꽤나 훌륭한 무장 클래스의 인물이었습니다. 24세에 조슈번의 대표로 청에 가게 되었을 때에는 중간에 들른 나가사키에서 모든 돈을 써버리기도 한 물정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청나라에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편 전쟁로, 영국에 진 청나라는 10년 이상에 걸쳐 내란이 계속 되어, 국민이 외국인의 노예와 같이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내일의 일본의 모습일지도 모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귀국과 동시에, 네델란드 제의 최신예의 군함을 독단으로 구입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일들은 아버지의 위광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보수적입니다. 하지만 그는 효성이 가득해, 아버지에게 따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자세를 보이게 된 것이 다름아닌 제 2차 조슈 정벌이었습니다.



그의 사세구



 이 때, 해군 총독으로 임명된 신사쿠는 전대미문의 공격으로 종횡무진의 대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막부군의 오구라성을 점령했을 때 그는 장난이 아닌 양의 피를 토해 버렸습니다. 신사쿠는 폐결핵에 시달려 결국 게이오 3년 4월 14일에 29세의 젊음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개달은 그는 사세구를 읊었습니다.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世を おもしろく

재미있는 것도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그러자 간병하던 노무라보우토니(野村望東尼)가 이 사세구에 4, 5구를 첨가했습니다. 이렇게 유신을 꿈꾼 한 명의 지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すみなすものは 心なりけり

살아간 것은 마음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