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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의 전신, 로시구미 결성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의 전신, 로시구미 결성



 분큐 3년(1863년) 2월 27일은 선조의 전신인 '로시구미(浪士組)'가 결성되었습니다. 新撰組라고도도 하고, 新選組라고도 합니다. 국장인 콘도 이사미(近藤勇)도 둘 다 썼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옳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다 맞다고 할 수 있죠.



신선조(신센구미)



 신선조는 원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상경하기에 즈음해, 그 경비를 담당할 사람을 넓게 모집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00명 정도의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들이 모여, 쇼군을 옹립해 교토로 향합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뒤, 이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쇼나이번의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근황파(勤皇派)와 통해 료딘들을 덴노의 부하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니다. 이로 인해 조직이 공중 분해되어, 대부분은 에도에 돌압니다. 하지만 그 중의 몇 사람은 쇼군에 대한 충정을 관철해 교토에 남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대표가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의 검술 도장 시에이관(試衛館)을 열고 있던 콘도 이사미였습니다.


 50명 남짓의 집단이 되고, 교토 미부의 야기저(八木邸)나 마에카와저(前川邸)를 거점으로한 그들은 '미부 로시구미(壬生浪士組)'라고 자칭해, 분큐 3년년 8월의 정변로 조슈번에서 퇴거한 교토 수호직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에게서, 존왕파의 행위의 단속하게 됩니다. 이즈음 집단의 이름이 '신선조(신센구미)'라고 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국장 세리자와 가모(芹沢鴨)와 대립한 콘도 이사미는 그를 암살해 버리고, 신선조 톱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이 각광을 받을 때가 옵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에 일어난 '이케다야 소동'입니다. 만회를 기도하고 있던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이 밀회를 하고 있던 이케다야를 급습한 신선조는 그들을 죽여 재기를 막았습니다. 이 일로, 단번에 신선조는 유명하게 되어, 인원도 130~40명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 후, 하마구리고몬의 변에서도 활약해, 많은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시대는 바뀌어 갑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 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 그리고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막부는 큰 충격을 받게되었습니다. 당연히, 행동을 함께 하고 있던 신선조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콘도 이사미



 싸움으로 죽는 사람, 도망친 사람 등 신선조는 조금씩 축소되어 갑니다. 패배한 막부군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의 군선으로 신선조도 에도로 향했습니다. 그 후, 신정부군의 고후 진군을 막기 위해, 신선조는 코요 친부타이(甲陽鎮撫隊)라고 이름을 재차 바꾸지만, 패배합니다. 이윽고, 콘도 이사미는 시모우사 나가레야마에서 잡혀 신정부군에 의해 이타바시의 형장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콘도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던 오키타 소지(沖田総司)도 병사했습니다. 그런데도 신선조는 아이즈에서 분전 합니다만, 아이즈도 함락됩니다. 이번에는 하코다테에 가서,에조 공화국을 목표로 하고 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등 옛 막부부군과 함께 신정부군과 싸웁니다만, 이 전투로 콘도의 오른 팔이었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가 사망했습니다. 신선조는 항복했고, 그 4일 후에는 옛 막부부군도 항복해 보신 전쟁이 종결해, 신선조도 마지막을 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