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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키요카와 하치로의 최후와 신선조의 탄생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키요카와 하치로의 최후와 신선조의 탄생



 분큐 3년(1863년) 2월 23일 에도에서 모집한 료닌을 인솔해 상경한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료닌들의 앞에서, 존왕양이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키요가와 하치로우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 내항(페리 내항)으로, 개국인가 양이인가의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일본은 다음 해, 다시 일본에 방문한 페리에 의해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과제 미일 통상조약과 차기 쇼군 문제로, 막부는 두동강이 됩니다. 당대의 쇼군은 제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였지만 그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쇼군으로 옹립 된 것은 기슈의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이치하시 가문의 양자가 되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였습니다. 그대로 이 둘은 개국파와 양이파이기도 했습니다. 화친 조약은 적대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개항은 통상조약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덴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조약을 맺어버린 것이 안세이 5년에 다이로우로 취임했던 이이 나오스케 였습니다.


 이이 나오스케가 기슈파이며, 오오오쿠(大奥)[각주:1]도 아군으로 하고 있었기에, 차기 장군은 이에모치로 결정되어, 반대파인 이치하시파(양이파)를 일소 하기 위해서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가 결행됩니다만, 강렬한 탄압이 반감을 샀기 때문에, 만엔 원년(1860년) 3월에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암살되어 버립니다(사쿠라다이몬의 변) 여기서 통상조약 조인의 이래, 조정과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을 느끼고 있던 막부는 쇼군 이에모치와 당대의 덴노 제121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와의 결혼을 진행시켜, 공무합체(公武合体)를 도모합니다. 한편 그 기슈파와 이치하시파가 우왕자왕하는 무렵에,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막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교토는 덴노가 있는곳이라는 것도 있어, 양이파의 집합소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이파에 의해, 사바쿠파(佐幕派)나 공무합체파에 대해, '텐슈(天誅)'라고 칭하는 암살, 습격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교토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교토 수호직을 신설해,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를 임명했습니다. 이윽고, 그 가타모리 약 1,000기의 정예를 이끌고 교토에 들어간 것은, 분큐 2년년(1862년)의 12월 24일의 일이었습니다. 이것과 동시기에 막부의 정사총재직(政事総裁職)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나 로쥬우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静) 등에 의해서 료닌들을 모아 무투집단이 결성됩니다. 이것은 사바쿠파인 쇼나이번의 향사 출신의 키요카와 하치로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분큐 3년년(1863년)의 3월에 쇼군 이에모치의 상경이 예정되어 있는 막부로서는, 교토의 치안 유지는 급한 용무였습니다. 그래서 조속히, 이 키요카와 하치로에 대항해, 대사의 모집을 실시했습니다. 그 임무는 '쇼군의 상경에 앞서 교토로 들어가 치안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쇼군의 신변 경호를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콘도 이사미



 채용될 때에는 1명에 대해 10량의 일시금을 지급한 뒤에 쌀 1되가 매일 지급된다는 계약을 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활약하면 후에 막부의 신하로 등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회도 있었습니다. 분큐 3년(1863년) 2월 4일과 5일의 2일간에 걸친 채용시험에는, 근린의 젊은이 230명 남짓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있던 것이 에도, 이치타니로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의 검술 도장 시에이관(試衛館)을 열고 있던 콘도 이사미(近藤勇), 동향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 ), 그곳에서 식객인 야마나미 케이스케(山南敬助) 오키타 소지(沖田総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검객으로서 칼은 가리고 있었습니다만, 신분은 읍인이나 농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케다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랑도 있고, '언젠가 무사가 되어 나라에 충의를 다하고 싶다'라고 하는 생각도 있어, 이것을 기회로 보았습니다.


 분큐 3년(1863년) 2월 23일 교토에 도착한 그들은, 미부(壬生)의 신도쿠지(新徳寺)에 본영을 두어, 절이나 향사(郷士)의 집에 분숙 하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터무니 없는 것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 그들을 인솔 해 온 것은 그들을 모은 키요카와와 야마오카 테츠타로우(山岡鉄太郎)였습니다. 키요카와가 본영인 신토쿠지에서 주요 인물을 모으고, '이번의 상경은, 존왕양이의 선봉이 되기 위한 상경이다!'라고 선언해, 조정에 제출하는 같은 내용의 겐바쿠쇼(建白書)에, 신속하게 서명하라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키요가와는 이미 에도에 존왕양이를 논하는 '코비의 회(虎尾の会)'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알게된 로쥬우 이타쿠라는 곧바로 에도 귀환을 명령합니다.


 키요카와는 료닌들을 이용해 에도에서 존왕양이 활동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에도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그들과 헤어져 교토에 남은 것이, 콘도와 그 동료들 8명 그리고 미토파의 료닌 세리자와 가모(芹沢鴨)와 그 동료들 5명으로 합계 13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쇼군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 상경 자체가 조정과 쇼군의 관계를 양호하게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에도로 돌아간 키요카와는 막부의 원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료닌들을 이용해 상인들에게 반 협박을 하며 자금 조달을 하고, 외국인 습격 계획을 하다 위험시되어 4월 13일에 암살되어 버렸습니다. 한편, 콘도는 교토 수호직에 탄원해 '아즈번을 맡으라'는 약속을 얻어 내었습니다. 이제 후에 신선조가 되는 낭인 무사대(壬生浪士組)가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1. 에도성에서 의 정실과 측실이 거처하던 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