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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분큐 3년(1863년) 9월 28일, 제1회 사츠에이센쇼 평화 회담이,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열렸습니다. 


 분큐 2년년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요구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로 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츠마번을 다스리던 시마즈 하사미츠도, 아들인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 범인을 인도할 생각도, 배상금도 건네줄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7월 1일에는, 수박 판매 결사대를 파견해 전투 태세에 들어갑니다.(수팍판매 결사대) 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 사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3일간 걸쳤지만, 애초에 교섭이 주 목적으로 별다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영국측은 쉽게 요코하마로 물러나 버립니다. 그러나 암스트롱포의 가공할만한 위력을 눈으로 본 시마즈는 변화하게 됩니다.(세츠에이센쇼 전쟁)



평화회담에 참여한 시마즈번측 인물들



 도쿠가와 약 300년 간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던 일본에서는 병기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지번인 사도하라 번주 시마즈 타다히로(島津忠寛)의 권유도 있어, 이대로 양이를 고집해 한층 더 피해를 확대하는 것 보다는, 영국과 화목하고 그 최신 기술을 배워 군사력을 기르는 편이 유리한 계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큐 3년(1863년) 9월 28일, 히사미츠의 명령을 받아 요코하마로 파견된 소바요우닌(側用人)인 이와시타 미치하라(岩下方平)와 오니와가타(御庭方)인 시게노 카즈츠구(重野安繹) 등을 대표로 하는 교섭단이 1차 사츠에이센쇼 회담을 시작합니다. 3차에 걸친 회담에서 사츠마는 '영국이 일본을 점령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영국은 '사츠마는 교역을 바라고 있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월 1일에는 사츠마번이 나마무기사건의 범인을 처형하는 일과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일을 조건으로 평화가 성립합니다. 동시에, 사츠마 번은 군함의 구입에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마즈의 번사들은 양이의 태도를 바꾸지 도 못하고 , 이 화친에 맹 반대합니다. 그런 그들의 설득에 임한 것이,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입니다. 배상금은 지불하지만, 그 돈은 막부로에서 빌리기 때문에, 명목상인 화목이라는 것을 강조해 어떻게든 반대파를 억눌렀습니다. 이 막부로부터 빌린 10만 달러는 에도막부 말기의 혼란 사이에서 애매한 채로 토바후시미의 전투에 돌입해, 이윽고는 조슈와 짜 막부를 넘어뜨려 버리므로, 결국은 없던일이 되기는 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음, 범인을 사츠마번이 처형한다는 조건입니다. 당연히 사츠마 번사들은 눈을 뒤집고 이 조건에 반대했지요. 영국도 모처럼 좋은 분위기가 된 마당에 초를 치기 싫어서 따로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후에 사츠마번은 영국붐이 일게 됩니다.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근대적인 공장의 설계를 의뢰하며, 기술자의 파견 등을 의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밀접한 협력 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사츠마번은 이후로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부국강병,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해 유신의 원동력이 되어 새 일본을 만드는데 앞장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