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간몬의 변, 덴노산 17 열사의 할복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8월 18일의 정변으로 내려진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조슈번이 고쇼로 밀려 들었기 때문에, 사츠마번이나 아이즈번과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긴몬의 변(禁門の変)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로 덴노산에서 17명의 열사가 할복했습니다.
긴몬의 변
덴노산은 전국시대에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죽인 야마자키의 전투가 일어난 곳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웅을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을 '덴노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개항기에도 덴노산에서 중요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에도막부 말기,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건 조슈번과 분큐 3년 8월 공무합체를 꿈꾸는 아이즈, 사츠마번의 협격에, 조슈번은 교토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다음해인 겐지 원년(1864년),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교토의 이케다야에 잠복 하고 있던 조슈번의 과격파 지사들을 신선조가 습격해 재기를 막았습니다.(이케다야 사건) 이 소식을 들은 쵸우슈번내의 적극파는, 곧 바로 교토 탈환을 목표로 대군을 인솔해 상경합니다.
7월 19일 야마사키 덴노산에 포진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사가, 덴류지에 포진한 키지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 후시미 조슈번저에 진을 치는 후쿠하라 에치고(福原越後) 등의 조슈 세력은 이 세 방면에서 고쇼로 향해 진군을 개시합니다. 이 때 구사카 겐즈이와 함께, 덴노산에 포진 하고 있던 것이 치쿠고 스이텐구우(水天宮) 신관 마키 이즈미노카미 호우신(真木和泉守保臣)입니다. 그는 치쿠고라고 하는 지명으로부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치쿠고국 쿠루메 출신으로, 쿠루메 스이텐구의 신관입니다. 즉, 사츠마 번주인 시마즈 히사미츠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도 친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존왕파인 그는 예의 데라다야 사건으로, 당분간 유폐 되어, 그 다음은 조슈번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날 고쇼를 지키는 막부군과 교토 탈환을 목표로 하는 조슈군과의 사이에 장렬한 싸움이 전개됩니다. 가장 격렬한 교전이 있던 것이, 고쇼의 하마구리 고몬(蛤御門) 또는 이것을 일컬는 말인 '고몬'에서 유래해 '고몬의 변'또는 '하마구리고몬의 변'이라고 합니다.
17열사의 묘
여기서 조슈번은 대패해 버립니다. 상경을 주도했던 키지마 마타베에(来島又兵衛)는 문 근처에서 할복했고, 사카이쵸 고몬 주변에서 싸우고 있던 구사카 겐즈이도 부상해, 그 후 할복 합니다. 격렬한 탄환이 난무하는 중에, 철퇴를 피할 수 없게 된 조슈군은 어떻게든 덴노산이 있는 야마자키까지 철퇴합니다. 그리고, 야마자키에서 후쿠하라 에치고 등 조슈번 주력 부대를 이끌던 마키 호우신 이하 17명의 열사들이 후위를 지켰습니다. 진군보다 철군이 훨씬 힘든 것으로, 게다가 조슈군이 발한 총탄이 고쇼를 직격해, '역적'이 되어버린 조슈에서 이를 바라보는 17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덴노산에 올라 장렬히 할복합니다. '역적'으로 불리던 그 17명은 후에 메이지 유신을 맞은 뒤에 오명을 벋어 유신의 선구자로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10월 21일, 매년 묘전제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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