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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진무군의 괴멸, 한노 전쟁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진무군의 괴멸, 한노 전쟁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23일 요전날의 우에노 전쟁에 승리한 신정부군이, 그 기세를 몰아 진무군(振武軍)을 공격한 '한노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에노 전쟁으로부터 2개월 전, 쇼기타이(彰義隊)가 아사쿠사 혼간지에서 간에이지(寛永寺)로 그 본거지를 옮겼습니다. 원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명예 회복과 신변 수호를 목적으로 결성된 쇼기타이는 서서히 신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집단으로 변모합니다. 한편, 총재 시부사와 세이치로(渋沢成一郎)는 십수명의 대사와 함께 혼간지에 남았습니다. 이윽고 쇼기타이가 권력을 사용해 시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하는 등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세이치로는 4월 11일 '신정부군은 되지 않는다', '신..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게이오 4년(1868년) 3월 6일 곤도 이사미(近藤勇)가 인솔하는 코요 친부타이 (甲陽鎮撫隊)가,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인솔하는 신정부군과 코슈 카츠누마에서 격돌한 카츠누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3일에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부군은 1월 6일에 막부군의 대장인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한 일을 눈치챈 제 번의 장병들은, 1월 7일~8일에 걸쳐 차례차례로 오사카성을 뒤로 합니다만, 9일에는, 오오사카성 탈출을 납득 하지 못하고, 성과 함께 전사 할 각오인 잔류한 병사들에 의해 불이 발해져 오사카성은 불길에 싸였습니다. 이 때, 오사카만을 출발해 에도를 목표로 한 막부 군함에는 신선조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마번에 토막의 은칙이 내리다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마번에 토막의 은칙이 내리다 게이오 3년(1867년) 10월 13일, 사츠마 번주인 시마즈 부자에게 '토막의 은칙(討幕の密勅)'이 내렸습니다. 게이오 3년(1867년) 10월 13일은 일본의 역사가 결정된 날입니다. 토사번의 참정 고토 쇼지로우(後藤象二郎), 사카모토 료마가 원안을 생각한 선중팔책(船中八策)을 기초로 한 건백서는 이미 로쥬우를 통해 제 15 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선중팔책) 하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질지 어떨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료마는 죽음을 각오하는 편지를 보내면서까지 교토로 향했습니다. 요시노부는 니죠성의 넓은 방에서, 수도에 있는 번의 중신들을 앞에 두고, 그 속마음을 말했습니다. 이 요시노부의 결의는 다음날인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대정봉환 협력의 시작, 삿토맹약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대정봉환 협력의 시작, 삿토맹약 게이오 3년(1867년) 6월 22일, 사츠마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토사의 고토 쇼지로우(後藤象二郎),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나카오카 신타로우(中岡慎太郎) 등이, 대정봉환 협력을 나타내는 맹약인 삿토맹약(薩土盟約)을 성립시켰습니다. 게이오 3년(1867년) 4월 토사번의 단체로 정식 발족한지 얼마 안되는 카이에이타이(海援隊)에게 닥친 대사건 이로하마루(伊呂波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배상 문제를 지켜본 사카모토 료마가 당시에 토사 번의 참정으로 활약하고 있던 고토 쇼지로우와 함께 번의 증기선인 야쿠모마루(夕顔丸)를 타고 나가사키를 출항한 것은 6월 9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이 1월 나가사키에서의 회담에..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시모노세키 전쟁(3) 시모노세키의 전후 처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시모노세키 전쟁(3) 시모노세키의 전후 처리 겐지 원년(1864년) 8월 8일 시코쿠 연합 함대의 공격에 의해, 시모노세키에 있던 조슈번의 포대가 괴멸 되어, 시모노세키 전쟁이 종료했습니다.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의 내항으로,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시킨 막부와 그런 막부에 불만을 가지는 양이파는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와 결합해 '존왕양이파'가 됩니다. 그 존왕양이파의 대표격이 바로 조슈번이었습니다. 그런 조슈번이 분큐 3년년(1863년)의 5월에, 간몬 해협에 정박 중이던 미국 상선에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시모노세키 전쟁 발발), 해협을 지나는 외국선에 차례차례로 발포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의 4개국의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습격합니다. 이를.. 더보기
일본 유시니대 역사편; 덴츄구미의 멸망, 요시무라 도라타로 할복 일본 유시니대 역사편;덴츄구미의 멸망, 요시무라 도라타로 할복 분큐 3년 연(1863년) 9월 27일,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 지사로, 덴추구미(天誅組)를 조직했던 요시무라 도라타로(吉村寅太郎)가 할복 했습니다. 텐포우 8년(1837년), 토사에서 촌장의 아이로 태어난 요시무라 도라타로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과 동시에, 학문이나 검술에 매진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검술의 스승인 다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의 영향으로 서서히, 양이 사상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24세 때, 한페이타가 결성한 토사 킨노우도우(勤皇党)에 참가 합니다. 다음 해, 한페이타의 하인이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만나, 그 사상에 감화 되어 토사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되는 것을 결의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2) 사츠에이센쇼 전쟁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쇼 전쟁(2) 사츠에이센쇼 전쟁 발발 분큐 3년(1863년) 7월 2일,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사츠마 번의 기선을 나포한 영국 함대를 향해 사츠마 번이 포격을 개시해 일간에 걸쳐 전개되는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을 방해한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계속 무시하는 사츠마 번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영국 공사 대리 존 닐은 기함 유리아라스호이하 7척의 영국 함대를 인솔하고, 직접교섭을 위해 가고시마 만으로 다가옵니다. '수박 매도 결사대'를 만들어 함대를 탈취하려 했던 사츠마번측의 행동에 인내심이 끊어진 닐은 함대 사령관인 아우구스트 쿠퍼에 강경 수단을 취하도록 명령을..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분큐 3년(1863년) 7월 1일, 영국 공사 대리 닐이,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영국 함대를 이끄는 쿠퍼 제독에게 세츠에이센쇼 전쟁을 명령했습니다. 전년 8월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페리의 외국 함선 내항(페리의 내항)에 의해, 길게 닫고 있던 쇄국의 문을 연 막부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일으켜, 개국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살해된 뒤, 관동 일대에서는 존왕양이파에 의한 외국인 살상 사건이나, 외국 공사관 습격 사건등이 다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일어난 것이 나마무기 사건입니다.(나마무기 사건)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시모노세키 전쟁(1) 시모노세키 포격 개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시모노세키 전쟁(1) 시모노세키 포격 개시 분큐 3년 연(1863년) 5월 10일, 조슈번이 간몬 해협에 정박중이던 미국 상선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페리의 외국 함선 입항에 시작된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은 불평등한 조약에 개국을 단행한 막부와 거기에 반대하는 양이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이파는 역시 외국을 싫어했던 당대의 코우메이덴노와 결합해 '존왕양이 운동'을 펼쳐, 특히 과격하게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미토번, 사츠마번, 조슈번의 3번은 외국의 공사관에 화공을 하는 등, 실제로 외국과 불화를 일으킵니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라고 하는 강행 수단으로 양이파를 일소 하려고 한 이이 나오스케는사쿠라다몬 밖에서 암살되어 버렸습니다.(사쿠라다이..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의 상경 시도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의 상경 시도 메이지 24년(1891년) 1월 25일, 히젠 카라츠(唐津) 번주로, 에도 막부 말기, 로쥬우(老中)로 활약한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小笠原長行) 70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분세 5년(1822년)에 카라츠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오사유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불과 2세였기 때문에, 가신들의 책략에 의해 '병으로 뒤를 이을 수 없다'고 막부에 보고되어 버립니다. 카라츠번은 나가사키라고 하는 중요 지점을 그 영지로 삼고 있습니다. 2세의 어린 아이를 번주로 세우면, '도저히 수습하지 못할것이다'고, 막부가 작은 영지로 소령이 명령될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오사유키는 4명의 양자의 뒤에 카라츠번을 잇게 됩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