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진무군의 괴멸, 한노 전쟁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진무군의 괴멸, 한노 전쟁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23일 요전날의 우에노 전쟁에 승리한 신정부군이, 그 기세를 몰아 진무군(振武軍)을 공격한 '한노 전쟁'이 있었습니다.


 우에노 전쟁으로부터 2개월 전, 쇼기타이(彰義隊)가 아사쿠사 혼간지에서 간에이지(寛永寺)로 그 본거지를 옮겼습니다. 원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명예 회복과 신변 수호를 목적으로 결성된 쇼기타이는 서서히 신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집단으로 변모합니다. 한편, 총재 시부사와 세이치로(渋沢成一郎)는 십수명의 대사와 함께 혼간지에 남았습니다. 이윽고 쇼기타이가 권력을 사용해 시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하는 등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세이치로는 4월 11일 '신정부군은 되지 않는다', '신정부군에 항복하지 않는다'는 2개를 조건으로 약 100명 정도의 대사를 동반해 쇼기타이에서 탈퇴합니다. 


우에노 전투로 쇼기타이는 괴멸합니다



 이 후 쇼기타이는 부총재였던 아마노 하치로우(天野八郎)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한편, 세이치로는 새롭게 진무군을 결성해, 오메(青梅)가도의 타나시(田無)에 있는 사이코우지(西光寺)를 본거지로 해, 사촌형제인 오다카 아츠타다(尾高惇忠)와 함께 당분간 대사를 모으는데 주력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사이 5월 1일에 에도의 치안 유지가 막부에서 신정부로 옮겨져 카츠 가이슈(勝海舟)에게서 쇼기타이의 해산 명령이 나옵니다. 당연히 해산하지 않고 우에노에서 농성하는 쇼기타이에 대해, 신정부는 5월 15일의 총공격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5월 15일에 우에노 전투가 발발하는 것입니다. 


 그 결전의 전날, 세이치로등 진무군은 타나시에서 하코네가사키(箱根ヶ崎)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우에노 전투의 소식을 듣고 구원을 위해 나온 것이었지요. 400명 남짓의 대사 중에는 참모로 활약하던 시부사와 히로시쿠로우(渋沢平九郎)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 출진한 진무군이었지만 도중에 쇼기타이의 패전을 알아, 그 날은 부득이 타나시로 되돌아 갔습니다. 5월 15일의 저녁에 자웅이 결정된 우에노 전투의 뒤 패주 한 쇼기타이의 대사 중에는 에도에 잠복 해 재기의 기회를 도모하는 사람, 막부의 해군을 장악 하고 있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에게로 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역시 진무군에 오는 사람이 제일 많았습니다. 쇼기타이의 잔당을 흡수해 1,000명~1,500명이 된 진무군은 본거지를 한노(飯能)에 있는 노우닌지(能仁寺)로 옮겨, 신정부군의 습격에 대비합니다.


신정부군의 화력에는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게이오 4년 연(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23일 호노카, 우에노를 떨어뜨린 기세 신정부군 약 3,500이 진무군의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병력의 차이는 분명히 컸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니는 신정부군에 비해서, 아직 진무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시가전이 전개되었지만, 오전 10 시경에 승패가 결정된데다가 세이치로는 피탄해 부상하고, 아지카타는 패주했습니다. 아츠타다는 부상한 세이치로를 도와 우에노 이카호(伊香保)로 도망쳤습니다. 한편, 히로시쿠로우도 오미야(大宮)로 도망치는 도중, 쿠로야마 마을(黒山村)에 도달해, 신정부군의 수색대에 발견되어 버립니다. 추격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무사로 보이지 않기 위해 칼을 버린 히로시쿠로우였지만, 진무군인 것이 들켜 응전합니다. 적 수명에게 상처를 입혀 어떻게든 그 자리를 도망쳤습니다만, 일발의 총탄이 태퇴를 관통해, 최후를 깨달은 그는 할복해, 22세의 생애를 끝냈습니다. 한편, 이카호로 도망친 아츠타다와 세이치로는 다시 에도로 돌아가, 시나가와 바다에 있던 에노모토 함대와 합류해 북쪽으로 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