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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기타고에 보신전쟁(3) 나가오카성 함락되다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기타고에 보신전쟁(3) 나가오카성 함락되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19일 기타고에 보신 전쟁 중에 나가오카성이 함락 됐습니다. 


 토바 후시미 전투로 시작된 보신 전쟁은 에도 무혈 개성 뒤, 한층 더 북쪽으로 향하는 신정부군에 대해 아이즈번, 쇼나이번을 중심으로 오오우에츠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해, 저항하는 토호쿠의 여러 번은 갈등을 빗게 됩니다. 오지야 회담에서 신정부와 대화가 결렬한 나가오카번의 가로 가와이 츠구노스케(河井継之助)는 5월 13일 신정부가 본영을 두는 오지야를 공격하는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미 신정부군의 것이 되고 있던 군사적 요소 에노기사키(榎峠)와 아사히야마를 빼앗았습니다. 그 뒤, 당분간 시나노가와를 끼고 교착 상태가 된 양자는 토바 후시미 개전 이래, 거의 패배를 모르고 진군한 신정부군은 이 아사히야마 쟁탈전에서의 심한 패배에 동요해 철퇴하자는 의견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키헤이타이



 그러나 단호히 철퇴를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은 조슈번의 키헤이타이(奇兵隊)를 인솔하고 있던 총독부 참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였습니다. 아리토모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오지야 보다 북쪽에 있는 세키하라에서 군을 진군시키고 시나노가와를 건너, 동맹군의 배후에서 나가오카성을 급습하는 작전을 제안합니다만, 사츠마번의 총독부 참모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에게 일축 되어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아리토모는 키헤이타이 출신 미요시 시게오미(三好重臣)와 함께,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19일 이 작전을 결행하기로 합니다. 한편, 동맹군인 츠구노스케도 이대로 아사히야마에 신정부군을 유인해 두고, 은밀하게 주력 부대를, 북쪽에 있는 마에지마에 집결시켜 거기에서 시나노가와를 건너 오지야의 본영을 습격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이 작전의 결행도 공교롭게도 같은 5월 19일의 일이었습니다. 다만, 아리토모의 작전 결행은 5월 19일 새벽, 츠구노스케의 작전 결행은 5월 19일 밤이었습니다. 이 시간의 차이가 양자의 승패를 나누었습니다. 


 삿쵸의 정예 부대에 카가번이나 타카다번의 군사를 가세한 약 1,500의 신정부군은 아직 날이 채 새지 않는 시나노가와를 건넙니다. 요 며칠 째의 비에 의해 증수한 시나노가와는 격류가 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예 부대는 어떻게든강을 벗어나 일제히 나가오카성에 쳐들어갑니다. 나가오카성은 시나노가와를 천연의 요충지로한 습지에 구축된 히라죠였지만, 포격이 주가 되고 있던 에도막부 말기의 싸움에는 그 천연의 요충지는 거의 무력합니다. 게다가 동맹군은 아직도 아사히야마나 에노기사키 많은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고, 츠구노스케가 생각하고 있던 마에지마에도 얼마안되는 군사 밖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급습을 안 츠구노스케는 곧바로 나가오카성으로 달려 들어 오테몬에서 나가오카번의 비밀 병기 개틀링건을 잡고 분전 합니다. 


보신전쟁 때의 개틀링건



 이 개틀링건 미국의 남북 전쟁때에 발명된 수동식의 기관총으로, 핸들을 돌리면 몇 개의 총신을 묶어둔 중심이 회전하며 총탄을 발사하는 것으로 1분에 150발~200발이 발사되는 경악할 만한 무기였습니다. 일본에는 3문이 수입되어 그 중 2문을 이 나가오카번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채 갖추어지지 못한 채 공격받은 나가오카성에 이미, 승패는 분명했습니다. 이윽고, 츠구노스케가 총격을 받았기 때문에, 성을 버리자는 결의를 했습니다. 나가오카성을 나와 동쪽의 유우큐잔(悠久)과 모리다테사키(森立峠)로 철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가오카성을 포기하지 않은 츠구노스케는 보급의 중심지인 이마쵸를 목표로 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