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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유격대 패퇴! 하코네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유격대 패퇴! 하코네 전투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27일 전날 유모토야마자키(湯本山崎)에서 신정부군과 격돌한 유격대(遊撃隊)가 아타미(熱海)까지 철퇴한 뒤, 에노모토 함대와 오오우에츠열번 동맹과 합류해, 하코네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원래 제14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친위대로 조직된 오쿠츠메(奥詰)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아래에서 '유격대'로 이름을 바꿔 토바 후시미 전투 등에서 공을 거뒀습니다. 토바 후시미 패전 후는 요시노부 호위의 임무를 맡은 유격대였지만, 그 요시노부가 미토로 퇴거할 즈음 일부의 대사는 우에노에 있던 쇼게키타이(彰義隊)에 참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반 신정부군이 되었습니다.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멤버는 약 30명 정도, 이들을 인솔하고 있던 것이 히토미 카츠타로우(人見勝太郎)와 이바 하치로(伊庭八郎)였습니다.


죠자이번주 하야시 타다타카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4월 28일 카츠타로우 등은 가즈사(上総) 죠자이번(請西藩) 1만석의 젊은 번주 하야시 타다타카(林忠崇)를 방문합니다. 타다타카는 아직 21세의 젊은이 였지만 '장래는 막부 로쥬우가 될 그릇이다'는 평판의 인물로 도쿠가와의 재흥을 바라고 있었기에,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습니다. 카츠타로우, 하치로와 면회해 한눈에 그들을 마음에 들어한 타다타카는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죠자이번은 정면에서 신정부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만큼 큰 번이 아닙니다. 이대로 그가 반 신정부의 자세를 취하면, 번사는 물론 영민까지도 말려 들게해 전원 옥쇄하는 것이 명약관화 했습니다. 또, 근신 중인 요시노부에게 폐가 될지도 모릅니다.


 타다타카는 59명 뿐인 번사를 거느리고, 번주 스스로 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다고 하는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유격대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카츠야마번(勝山藩)이나 타테야마번(館山藩)등의 번에서 사람을 모아 200명이 된 그들은 윤 4월 12일, 마나츠루(真鶴)로 향했습니다. 오다와라번(小田原藩)을 수중에 넣어 교토의 수뇌부와 에도의 군부를 분단 한 뒤에 에도의 신정부군을 배후에서 찌르려는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이 때에, 에도에서 긴박한 통지가 날아옵니다. 5월 15일 우에노의 쇼케키타이를 신정부군이 총공격한 우에노 전투가 발발한 것입니다. 3일 뒤인 5월 18일 이 소식을 알게 된 카츠타로우는 곧바로 제1군을 인솔해 출진해 미시마의 관문을 함락시키고, 20일에는, 오다와라번과 화목을 맺어 하코네의 관문역시 점거했습니다. 


하코네 전투



그러나 신정부군은 곧바로 오다와라번에 압력을 가해 오다와라번은 유격대에게 자금과 탄약을 선물로 주고 쫓겨나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카츠타로우는 시나가와 바다에 정박중의 함대를 지휘하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단신으로 시나가와로 향합니다만, 그 사이에 배신한 오다와라번은 신정부군의 선봉이 되어 하코네로 진공해 옵니다. 5월 26일 유모토 야마자키에서 양자는 격돌했습니다. 하야가와(早川)에 가설된 산마이바시(三枚橋)를 끼고, 포격전과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카츠타로우의 부재 중, 여기를 사수하는 것은 제 2군을 지휘하는 하치로였습니다. 


 그는 신교도류(心形刀流)의 사용자로, '이바의 소텐구(伊庭の小天狗)'라는 이명을 지니는 검객입니다. 하지만 총탄을 피할 수는 없고, 일발의 총탄이 허리를 관통해 버립니다. 게다가 타카하시 후지타로(高橋藤太郎)라는 인물이 습격해, 왼손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어 버립니다. 베어진 왼손이 너덜거리지만, 후지타로를 베어 죽인 뒤 2명을 더 베었지만 더 이상은 싸우지 못하고 유모토에서 하코네로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온 카츠타로우와 아타미에서 합류한 유격대는 중상을 입은 하치로를 에노모토 함대에 맡긴 뒤, 나가오카성을 탈환하려 분발하던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로서 우에노, 한노, 하코네로 이어진 관동의 반 신정부 세력은 괴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