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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기타고에 보신전쟁(5) 츠구노스케 나가오카성 탈환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기타고에 보신전쟁(5) 츠구노스케 나가오카성 탈환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7월 24일, 기타고에 보신 전쟁에서, 5월 19일에 신정부군에 본거지인 나가오카성을 빼앗긴 나가오카번의 가와이 츠구노스케가 탈환 작전을 결행했습니다.


 에도성 무혈 개성 뒤, 한층 더 북쪽으로 진공하는 신정부군과 토호쿠의 번들로 결성된 오오우에츠열번 동맹 사이에 발발한 기타고에 보신 전쟁은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5월 2일에 신정부 군감 이와무라 세이이치로우(岩村精一郎)등과 나가오카번 가로 가와이 츠구노스케 사이에 행해진 오지야 회담이 결렬되자 양자는 5월 13일 신정부군의 최전선인 아사히야마 쟁탈전을 전개했습니다. 시나노가와를 끼고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신정부군의 오지야 본영을 공격하는 츠구노스케와 서해안에서 강을 건너 나가오카성을 목적을 정한 총독부 참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는 공교롭게도 5월 19일에 공격 작전을 세웁니다. 이 날의 전투는 먼저 결행한 신정부군의 승리가 되어, 나가오카성은 함락 되었습니다. 거점을 잃은 츠구노스케와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은 나가오카성을 탈환하기 위해, 우선 그 북쪽에 있는 이마쵸를 탈환합니다.


나가오카성의 모습



 이 때의 패전에 위기감을 안은 아리토모는 끊임없이 중앙에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중앙에서는 기타고에서 지리하게 전투하고 있는 것이 외국의 공사관에도 전해지자 이대로는 신정부의 위신에도 관련된다고 하여, 새롭게 요시아키라 친왕(嘉彰親王)을 총독으로 임명해,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총독부 참모로 파견해, 기타고에 방면의 신정부군은 총원 3만의 대군이 되었습니다. 6월 1일 이마쵸 탈환 뒤, 양군이 대치한 채로 당분간 교착 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만 이즈음 총독부 참모 사이고 다카모리가 스스로 사츠마번 군사들을 인솔해 출정 하려 합니다. 이 소싣을 우연히 들은 츠구노스케는 사츠마의 정예가 도착하기 전에, 나가오카성을 탈환하기 위해, 기사회생 작전의 결행을 결의합니다. 그것은 천연의 요충지로 불리고 있던 핫쵸오키(八丁沖)라고 하는 넓은 늪 지대의 부분을 넘어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나가오카성의 북동에 퍼지는 그 곳은 옛부터 마귀가 사는 장소라 불려 사람들이 출입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오랜 세월  나가오카성을 본거지로한 츠구노스케도 아마 여기로 적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공격을 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험준한 장소를 밤의 어둠안에서 행군하는 것이므로, 그 준비는 정확하게 해야 했습니다. '산', '강'이나, '누군냐'라고 물으면 '구름'이라고 대답하는 암호나, 어두운 곳에서의 표적이 되는 횃불은 반드시 '시계 밖에 둔다'라던가 전원이 백목(白木)의 복대를 착용하는 등, 주도면밀한 규칙정했습니다. 


엄청난 늪지대였던 핫쵸오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7월 24일 오후 6시 반 '적은 우리보다 많다. 어차피 죽는다면 성벽 아래에서 죽자!'는 츠구노스케의 호령에 사기가 최고조로 오른 690명은 핫쵸오키로 진군 합니다. 오수에 잠기며, 청죽을 지팡이로 해 늪에 침입한 그들은 다음 25일 오전 4 시경, 맞은 편의 토시마에 상륙합니다. 이 토시마 상륙 시에 최초의 전투가 벌어져, 전초 부대인 키토우 쿠마지로우(鬼頭熊次郎)가 전사한다고 하는 비극은 있었지만, 실은 이때 츠구노스케에 있어서 운이 좋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신정부군은 25일에 이마쵸에 총 공격을 개시할 예정을 해 나가오카의 신정부군 본영에서는 그 전날인 24일의 밤에, '전승의 사전 축하' 칭해 연회를 열어 대부분의 사람이 만취해 폭수 중이었습니다.


 여기에 츠구노스케가 이끄는 용감하게 노도와 같이 돌격하는 나가오카번 군사들은 훌륭히 승리를 거둡니다. 아리토모는 남방의 묘켄으로 퇴각해, 긴모치는 시나노가와를 건너 서해안의 세키하라까지 도주합니다. 나가오카성에 2개월만에 입성한 흙투성의 병사들에게, 길가에 모인 사람들은 물통을 내밀며 환영했다고 합니다. 오테도리에는 술통이 준비되어 이 날의 밤은 마치 축제와 같이 환희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당연하게도 대군을 동원한 신정부군이 이대로 물러날리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