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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에노모토 다케아키, 막부 함대 인솔해 출항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에노모토 다케아키, 막부 함대 인솔해 출항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8월 19일,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가 막부 함대를 인솔해 시나가와 바다를 탈출했습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



 보신 전쟁은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3일 에도에서 테러 행위를 실시하는 사츠마번의 토벌 허가를 얻으려 토바 가도와 후시미 가도를 통해 오사카에서 교토로 향하고 있던 막부의 행렬에 사츠마번이 포격 해 개시된 토바 후시미의 전투가 시작이었습니다. 실은 그 1일전 네덜란드 유학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지휘하는 막부 전함 카이요우마루(開陽丸)가 오사카에서 사츠마의 헤이운마루(平運丸) 등 3척의 군함을 파악해 포화를 퍼부어 대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육전에서 막부측이 패퇴했기에 다케아키는 카이요우마루를 오사카만에 정박시키고 반격의 비책을 가슴에 품어 오사카성에 있는 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에게로 향합니다. 하지만 정작 요시노부는 그와 엇갈려 몇 안되는 측근을 거느리고 카이요우마루를 타고 에도로 돌아가 버립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어쩔 수 없이 오사카성에 남아 있던 무기나 병량 등을 시작으로 18만량의 고요우긴(御用金)[각주:1] 충당하고 후지잔마루(富士丸)에 타 출항합니다. 이 후지잔마루에는 곤도 이사미나 하지가타 토시로 등 신선조도 승선해, 함께 에도로 돌아갔습니다. 그 직후 오사카성은 불타, 보신 전쟁의 초전 토바 후시미의 전투는 막을 닫았습니다. 이 토바 후시미의 교전 중에 어기를 내걸어 관군이 된 삿쵸는 이윽고 에도로 진군합니다. 에도에서 관군과의 철저 항전을 외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해군 부총재로 임명된 다케아키였습니다. 그는 '군함으로 오사카를 포격해 기나이를 제압하고, 에도성 목전에 있는 관군을 협격 한다'는 작전을 제안합니다. 그런 항전파를 가로막은 것이 카츠 가이슈(勝海舟)였습니다. 전쟁 회피를 결단한 요시노부의 결의를 받아 카츠 가이슈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을 해 4월 11일에 에도성의 문을 열기로 합니다.


 그러나 납득의 가지 않은 다케아키는 4월 11일의 밤 카이요우마루 이하 8척의 군함을 인솔해 시나가와 바다에서 타테야마 바다로 퇴거해 버립니다. 에도성을 건네준 이상, 남는 것은 해군의 인도와 향후의 도쿠가와의 장래입니다. 여기서 해군의 인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도쿠가와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다케아키도 주군의 위기를 역설하는 가츠 가이슈의 설득에 군함을 스스로의 지휘하에 두면서도, 시나가와 바다로 되돌립니다. 5월 24일, 도쿠가와의 당주를 아직 어린 도쿠가와 카메노스케(徳川亀之助)로 하고 스루가 70만석의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이제 도쿠가와의 위기는 지나갔습니다. 토바 후시미 전투 마지막에 오사카성에서 실어온 무기나 집기, 고요우킨을 가지고 신정부의 눈을 피해 남은 막부군 장병들을 실었습니다. 


출항하는 다케아키의 함대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8월 19일 새벽 오랫만에 활짝 개인 하늘에, 기선 카이요우마루에서 진군을 알리는 나팔의 소리가 울려 건넜습니다. 카이요우마루를 따르는 것은 군함 카이텐(回天), 한료우(蟠龍), 치요다카타(千代田形)과 수송선 신소쿠(神速), 쵸우게이(長鯨), 칸린(咸臨), 미카호(美嘉保)였습니다. 달빛이 비추는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향합니다. 목표는 바로 에조지(蝦夷地, 홋카이도)입니다. 하지만 우선 토호쿠로 향합니다.그런데 이날은 양력으로는 10월 4일, 태풍이 가까워질 즈음입니다. 폭풍우에 조우한 함대는 마카호, 한료우마루가 좌초해 버립니다. 아무튼 센다이번의 마츠시마만에 도착했습니다만, 이미 함대는 만신창이가 된 뒤였습니다. 아무튼 토호쿠의 맹자들을 손에 넣은 함대는 한층 더 북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1. 에도시대, 에도막부, 번,하타모토(旗本) 등이 재정난을 보조하기 위해 임시로 농민, 상인 등에게 상납받은 부과금 입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