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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전투(1) 보나리토우케 전투, 아이즈번 대패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전투(1) 보나리토우케 전투, 아이즈번 대패


게이오 4(1868년) 8월 20일 아이즈번의 거점 와카마츠성(若松城)을 공격하기 위해 신정부군이 니혼마츠성을 출발했습니다.


 막부군의 패배로 끝난 토바 후시미 전투 후, 관군이 된 삿쵸군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나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쿠와나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 등을 역적으로 하고 토벌령을 내, 동쪽으로 나아갑니다. 요시노부는 에도성을 명도해 스스로 근신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가타모리는 요시노부에게서 토쇼금지령의 선고를 받습니다. 이에 가타모리는 아이즈로 돌아가 군제를 정비하며 싸움의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신정부 측에 붙은 센다이, 요네자와의 양번은 '아이즈번 구제의 탄원서'를 제출합니다만, 허무하게 각하 되어 싸움을 결의한 나가오카번등과 함께 아이즈번은 토호쿠의 번들에 의한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을 결성해 보신 전쟁은 토호쿠로 무대를 옮깁니다. 관동의 전투, 기타고에의 전투와 동시에 진행된 아이즈 전투가 드디어 시작된 것입니다. 


보나리토우케 전투 사적지



 5월 1일에 아이즈의 현관문인 시라카와를 점령한 신정부군은 7월 29일에는 니혼마츠성을 탈취하고 드디어 본거지인 아이즈 와카마츠성을 목적으로 정합니다. 이 때 에도에서 우에노 전쟁의 지휘를 하면서도, 신정부군 전체의 책임자이기도 했던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는 우선,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에 속하는 토호쿠의 번들을 무찌르고 나서 아이즈 공격에 정신을 쏟을 생각이었지만, 니혼마츠의 현지에서 지휘하는 참모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나 이치지 마사하루(伊地知正治) 등은 우선 아이즈를 무찌르자는 작전을 진언합니다. 이 의견이 채용되어 결국 신정부군은 아이즈의 본거지를 목표로 합니다. 어느쪽으로 향할지에 대해 아타가키 타이스케는 고레이히츠토우케(御霊櫃峠)를 넘자고 주장했고, 이치지 마사하루는 보나리토우케(母成峠)를 넘자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지 않는 두명을 조슈번사가 중재해 이치지의 의견으로 합의했습니다.


당시 전황도



 게이오 4(1868년) 8월 20일 신정부군은 타이스케와 이치지가 인솔하는 본대와 타니 다테키(谷干城)가 인솔하는 좌익, 카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儀)가 인솔하는 우익으로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보나리토우케를 목표로 니혼마츠성을 출발했습니다. 양동 작전을 전개하는 별동대까지 합치면, 총원 3,000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한편 아이즈측도 이곳을 빼앗겨 용이하게 아이즈에 침입된다면 불리해집니다. 그렇기에 고개에서 산에 걸친 일대에 3단의 포대를 설치해 방어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것은 닛코에서 여기까지 온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가 인솔하는 덴슈타아(伝習隊)와 아이즈, 센다이번의 군사, 니혼마츠의 생존자 그리고 신선조의 생존자들 이었지만 그들 전부를 합해도 약 800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중에는 상당한 수의 농민병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8월 21일의 오전 9 시경 신정부군이 이시무시로(石筵)에 침입하며 포문이 열렸습니다. 개전과 동시 신정부군의 포격에 의해 제1 포대가 불탔습니다. 부득이, 제2 포대로 후퇴하는 아이즈 연합군을 측면에서 나타난 신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한층 더 후방에 배치하고 있던 수비대는 이타가키 타이스케가 인솔하는 토사번 군사들에 당해 버립니다. 드디어 제3 포대가 있는 보나리토우케 부근에 몰린 연합군은 어떻게든 5문의 대포로 응전합니다만 신정부군의 대포는 무려 20문이 넘었습니다. 적의 포격에 당한 데다가, 안개가 발생해 시야확보가 되지 않자 오후 4시에 퇴각 명령을 합니다만, 명령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 각자 패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