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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게이오 4년(1868년) 3월 6일 곤도 이사미(近藤勇)가 인솔하는 코요 친부타이 (甲陽鎮撫隊)가,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인솔하는 신정부군과 코슈 카츠누마에서 격돌한 카츠누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3일에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부군은 1월 6일에 막부군의 대장인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한 일을 눈치챈 제 번의 장병들은, 1월 7일~8일에 걸쳐 차례차례로 오사카성을 뒤로 합니다만, 9일에는, 오오사카성 탈출을 납득 하지 못하고, 성과 함께 전사 할 각오인 잔류한 병사들에 의해 불이 발해져 오사카성은 불길에 싸였습니다. 이 때, 오사카만을 출발해 에도를 목표로 한 막부 군함에는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도 타고 있었습니다. 곤도는 작년 연말에 고다이지당(高台寺党)의 잔당에 습격당해 오사카 성 내에서에서 정양중이었기 때문에,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는 토시조가 신선조의 지휘를 하고 많이 활약했습니다만, 에도로 돌아온 신선조는 불과 117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곤도 이사미



 요시노부가 우에노 관영사에서 근신 생활을 보내는 무렵에는 신선조는 장군 수호로 방비를 굳히고 있었습니다만, 이즈음 만들어진 쇼기타이(彰義隊) 같이 막부가 이대로 끝나 버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불만을 잘 이용한 것이 막부 육군 총재였던 카츠 가이슈(勝海舟)입니다. 그는 이때부터 에도성 무혈 개성을 그리고 있었겠지요. 토바 후시미 이래 신정부군은 토카이도와 나카센도의 두 패로 나누어져 에도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 한번도 교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 어떤 일을 꾸밀 필요가 있었습니다.


 카츠 가이슈는 곤도에게 신선조의 코 진격을 제안해, 나카센도의 하나로 나아가는 신정부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그 자금으로 금 500량, 대포 2문, 소총 5,000정을 전했습니다. 신선조의 생존자 70명을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된 총원 170명은 고요 친부타이(甲陽鎮撫隊) 명명되어 3월 1일에 기세등등하게 에도를 출발합니다. 덧붙여서 이 때 와카도시요리(若年寄)으로 임명된 곤도 이사미는 오오쿠보 타케시(大久保剛), 요리아이요리(寄合席)로 임명된 히지카타 토시로는 나이토 하야토(内藤隼人)로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헷갈리니까 그냥 곤도, 히지가타로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코 가도를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여성을 품에 안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던 중 곤도나 히지가타의 고향 타마(多摩)에 도착해 문제가 생깁니다. 교토에서의 활약상을 들은 타마의 사람들은 '영웅이 돌아왔다!', '고향에 금의 환향한다!'며 큰소란이 일어납니다. 당연하게도 그들을 맞이하려 연회가 열립니다. 좋게 말하면 호쾌하고, 나쁘게 말하면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이들이었던 신선조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습니다. 이 상태로 고후까지 68 km정도 남은 요세(与瀬)에 도착합니다만, 그런 그들이 들은 것은 '토사의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고후성까지 52 km를 남긴 곳까지 와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각의 유예도 남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취한 신선조는 빠르게 진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이젠지에 진을 친 고요 진부타이



 게이오 4(1868년) 3월 6일, 고후 카츠누마에 도착한 고요 진부타이가 본 것은 이미 점령된 고후성이었습니다. 당황한 히지가타 토시로는 막부측의 가나가와 수비대인 낫파타이(菜葉隊)에게 원군을 달라 부탁합니다. 하지만, 빌릴 수 있는 군사는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카시오(柏尾)의 다이젠지(大善寺)에 진을 친 고요 진부타이였지만, 이 절은 나라시대의 교우키(行基)에 의해서 건립된 유서 깊은 절입니다. 이 곳을 전화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곤도 이사미는 떨어져서 전투를 개시합니다. 그러나 승패는 분명했습니다.


 고요 진부타이 재편했다고는 헤도 신선조의 구식군대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한편, 신정부군은 급히 소집되었다고는 해도 서양식 군대의 최신 장비를 하고 있는데다 1,200명의 군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부타이의 9배 가까운 수 입니다. 결국 이 전투역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패주한 곤도는 다음 4월 체포되어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