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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오오쿠보 도시미치 오사카 천도 건의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오오쿠보 도시미치 오사카 천도 건의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19일,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사카 천도안'을 건의 했습니다.


 게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2일에 군사를 일으킨 막부군의 대열에 1월 3일에 신정부군이 대포를 발해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 관군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전년 10월에는 막부측이 대정봉환, 12월에는 왕정 복고의 대호령 낸 신정부군으로 갈등은 커집니다. 이번 토바 후시미 전투에도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막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아직도 신정부군은 막부에 대한 역적이라는 이미지를 닦아 낼 수 없었습니다. 이오 4(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19일 관군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인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제출한 것이, 「오사카 천도 백서(大坂遷都白書)」였습니다.


오오쿠보 도시미치



 도시미츠는 구미 제국들을 표본으로 덴노 중심의 새로운 정부가 정치를 실시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교토에는 공가가 여럿있어 새로운 정치를 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새로이 오사카를 수도로 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공가들은 맹반대합니다. 그리고 신정부군 내부에서도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결국, 오오쿠보 도시미치는 목표를 덴노의 '오사카 행차'로 변경합니다. 이에 3월 21일 교토를 출발한 메이지덴노는 오사카에 들어가, 다음날인 22일의 밤 절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난슈우지(難宗寺)입니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도가와의 범람을 위해서 쌓아 올린 제방 분로쿠테이(文禄堤)를 이용해, 교토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도로인 쿄카이도(京街道)가 만들어집니다. 쿄카이도 도쿠가와의 시대가 되어, 토카이도의 일부에 속해 후시미, 요도, 히라카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리구치 숙소는 오오사카의 현관문입니다. 그런 모리구치에 현재도 약 700 m 정도가 분로쿠테이의 자취로 남아 있습니다. 옛날은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에 크게 우거진 나무가 멀리서 보여 '아! 저기가 모리구치 숙소야, 곧 있으면 오오사카다.'라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난쥬지에서 일박을 보낸 메이지덴노는 다음 3월 23일에 모리구치에게 있는 동 혼간지의 말사(末寺) 쇼센지(盛泉寺)에 들어갑니다. 이곳에는 궁중에 있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장소로, 덴노가 제사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불과 수 주간 동안입니다만, 이 장소에 덴노가 있는 카시고도코로(賢所)가 있었다고 하는 일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이 일본의 중심인 수도라는 명분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수도로 기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오오쿠보 토시미치의 「오오사카 천도 백서」에 대항하는 안이 제출됩니다.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의 「도쿄 천도론(東京遷都論)」입니다. 당시는, 아직 에도로 불리고 있던 도쿄입니다. 에도 천도의 명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도에는 각 영주의 영주의 저택이 있어, 그 건물을 그대로 정부의 건물로 전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

2. 가까운 장래, 에조(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하려고 할 경우 오사카에서는 너무 멀다고 하는 것 

3. 오사카는 경제가 발전하고 있으므로 도시 기능은 계속할 수 있지만, 에도는 황폐 해 버릴 것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개월 후의 4월에는 새로운 관제가 발표되어 7월에는 에도는 도쿄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다만, 오사카던지 도쿄던지 교토에서의 천도 자체에 맹반대하는 공가들의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교토와 도쿄의 2곳을 거점으로 한다고 하는 형태로, 어디까지나 교토에 거주하는 덴노가 도쿄에 행차해 정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오사카가 수도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