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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토바 후시미 전투(5) 코베 사건으로 신정부 외교권 확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토바 후시미 전투(5) 코베 사건으로 신정부 외교권 확보



 게이오 4(1868년) 1월 11일, 토바 후시미 전투로 혼란하는 중, 코베에 피난하고 있던 미국해병을 오카야마번 군사가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시카성의 불로 토바 후시미의 전투는 끝난듯 했습니다만, 실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에도막부 말기의 이 시기 막부가 수호 통상조약을 맺은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러시아 등 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큰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은 프랑스의 롯슈와 영국의 파크스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먼 유럽에서는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만, 일본에 대해서는 그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시모노세키 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 서로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2월 7일, 열강 각국의 제일 목표인 오오사카와 코베의 개항이 이루어져 많은 외국인이 오사카로 모여 왔습니다. 이런 때에, 왕정 복고의 대호령 단행되어 외국인들도 일본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게 됩니다.



 외국인들이 '타이쿤'이라고 부르고 있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막부와 '미카도(Mikado)'라고 하던 메이지덴노의 신정부 즉, 두개의 정부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발발한 것이 토바 후시미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오사카성이 개성됩니다. 이 때, 오사카에 체재하고 있던 영국인 통역 아네스트 사토우 언제라도 오사카만 위의 배에 탑승할 수 있도록 텐포잔의 근처에 피난하고 있었습니다만, 영국 공사관의 일이 신경이 쓰여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불타오르는 오사카성을 눈앞으로 해, 폭도로 변한 민중이 약탈을 하고 있었다며 그 공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많은 외국인들은 전화를 피하도록 오사카에서 코베로 이동합니다만, 싸움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내전입니다. 따로 개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이오 4(1868년) 1월 11일 사건이 발생합니다. 싸움의 혼란 중 코베에서 오카야마번의 군사가 발포해, 미국해병을 사살해 버렸습니다. 이에 화난 열강의 군대는 코베항에 정박중이었던 배에서 상륙해, 외국인 거주지를 점거해 버립니다. 이 때, 외교권을 잡고 있던 것은, 막부 쪽이기에 막부가 해결할 일입니다만 정작 요시노부는 6일 밤에 오사카성을 빠져 나가, 8일에 오사카만을 출항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열강과의 대화를 한 것은 신정부측이었습니다. 칙사 파견된 것은 8월 18일의 정변로,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와 함께 정계에서 쫓겨나 그 뒤, 조슈의 보호를 받고 있던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였습니다. 1월 15일, 그는 조속히 각국의 공사와의 대화의 기회를 가져, 열강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일에 성공합니다. 이로서, 신정부는 외국에 의해 명백히 정부로 인정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열강이 어느 한 쪽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확실히 했습니다.


외국인들과의 회담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외국인에게, 할 수 있던지 얼마 안된 신정부를, 막부와 대등해 서는 대등의 정부인 일을 인정하게 해 양자의 교전중은, 어느 쪽의 아지카타에 도착하는 일도 없고, 중립이 입장을 취한다고 할 약속도 얻어 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코베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신정부군은 외교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프랑스 공사 롯슈는 약속을 깨고 요시노부에게 '프랑스가 전면 협력할테니, 사츠마번을 무너뜨리라'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노부 자신이 일본의 내전을 막으려 하려고 있었기에 은거해 버립니다. 만약 요시노부가 열강을 끌여들었다면 일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