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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토바 후시미 전투(3) 쇼군, 오사카성에서 도망치다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토바 후시미 전투(3) 쇼군, 오사카성에서 도망치다



 게이오 4(1868년) 1월 6일, 3일부터 시작된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의 막부군의 패배를 은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은밀하게 오사카성을 빠져 나가, 에도로 도망쳤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



 막부 토벌을 계획하는 사츠마번과 조슈번에 도쿠가와막부는 대정봉환을 실시해 버립니다. 물론, 다른형태로 정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만, 형태만으로는 덴노가 확실히 권력을 얻은 것입니다. 이에, 삿쵸 측은 명분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삿쵸는 결국 왕정 복고의 대호령이라고 하는 쿠데타를 결행해, 막부를 제거하려 합니다. 그리고 에도 내에 테러행위를 실시해, 막부에 대한 도발을 시작합니다. 이윽고, 그 도발에 참지 못한 막부가 에도에 있는 사츠마 번저를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사카성에 있던 요시노부는 게이오 4년 1월 1일에 '삿토의 표(討薩の表)'를 발해 사츠마번에서 조정의 뜻에 반해 왕정복고를 실시한 중신들을 인도해 달라는 명령으로, 실제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표를 조정에 제출하기 위해 1만 5천의 막부군이 1월 2일에 오사카성을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3일 사츠마측이 포격을 개시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결전을 '토바후시미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때, 신정부군의 3배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부군은 패주 해 버립니다. 그리고, 막부군의 패전을 오사카성에서 은 쇼군 요시노부는 게이오 4(1868년) 1월 6일의 밤 몇 안 되는 측근을 따르고 오사카성을 탈출해, 막부의 군함 카이요우마루를 타고 에도에 돌아가 버립니다. 즉, 오사카 성과 토바 후시미의 각 전장에서 군사를 남긴 채로, 리더만이 도망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요시노부의 행동은 '대장의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쳤다'며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도망에 큰 의문점이 있습니다. 토바 후시미에서 대패했다 하더라도 아직 막부군은 건재했습니다. 어째서 측근 몇을 데리고 도망친 것일까요?


 후에 요시노부는 아들에게'그 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도망은 급작스레 도망친 것이 아니고 깊이 생각한 뒤의 최선의 결단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실은 그가 오사카를 버리고 에도에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 공사 롯슈가 그를 방문해 '프랑스가 전면적으로 협력하기 때문에, 사츠마를 공격하자'고 한 것을 요시노부는 거부하고  끊고 있었습니다. 즉, 요시노부가 제일 무서워하고 있던 것은 이 내분을 틈타 외국의 세력이 일본을 지배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데리고 탈출한 측근 교토 수호직의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와 교토 죠시다이(所司代)의 쿠와나 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입니다. 교토를 지키는 두 장군을 데려가 버린 것으로 오사카성병들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토바 후시미 전투 발발의 전후, 오사카 성내는 터무니없는 흥분 상태였다고 합니다. 일본이 둘로 쪼개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상태, 여기서 이렇게 대대적으로 도망쳐 버리면 적아군에게 모두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입니다. 에도성을 나온 그는 우에노 관영사로, 고향 미토번으로, 시즈오카로 이동하며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듯한 달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