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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뒤, 쿠도산(九度山)에 추방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탈출해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반나절만에 결착납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로 향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 유키무라 부자 3명입니다만, 시모우치 이누부시의 숙소에서 미쓰나리의 밀서를 받은 뒤에, 형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붙어 그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합류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어 거성인 시나노 우에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오야마에서 회군한 이야에스의 동군 중, 히데타다는 나카센도우에서 서쪽으로 향해 진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7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립한 교토 호코지 종명에 트집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호코지 종명사건) 이에 도요토미 측은 분노하지만, 아직 전투의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많이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유산으로 료닌들을 고용해 무기의 준비도 시작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었지요. 이에 도쿠가와 가문의 파이프역이기도 한 이바라키성(茨木城) 성주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가 변명을 위해 슨푸로 향했습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그 이름을 달린 '시즈가타케 칠본창'(시즈가타케 전투)의 한 명입니다. 히데요시의 사후는 히데요리의 모리야꾸(傅役:스승역)를 맡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리 산하였기에 서군에 섰습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게이쵸 17년(1612년) 3월 21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가 화형에 처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크리스천)을 금지했습니다. 게이쵸 14년(1609년)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에 기항하고 있던 일본의 무역선에 승선하고 있던 뱃사람들이, 포르투갈선의 선원들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해 큰 싸움의 끝에, 50명 정도의 뱃사람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본의 무역선은 히젠 히노에번(日野江藩)의 배였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빠르지 않아 일본인들은 아직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수개월의 뒤, 1척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들어 옵니다. 정확히 그 무렵, 다른 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게이쵸10년(1605년) 5월 1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경을 재촉했으나 히데요리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게이쵸5년(1600년)이고, 오사카의 진의 발발이 게이쵸 20년(1615년)입니다. 이 사이에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지금에야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은 세키가하라를 엄청난 분수령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 내에 실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대로 중 가장 큰 힘을 가졌음에도, 직접 전투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발한 것입니다. 만약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였다면,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이 그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2) 서군의 거물들 처형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22) 서군의 거물들 처형당하다 게이쵸5년(1600년) 10월 1일, 앞의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패자가 되어, 그 후, 잡힌 이시다 미쓰나리등 세 명의 처형을 했습니다. 요전날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뒤에 도주해, 이부키산에서 잡힌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안코쿠지 에케이의 세명의 처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으므로 할복하지 못하고 자수 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는 왜 할복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를 교토까지 호송한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도중에, '전투에 진 이상, 깨끗하게 할복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바보 취급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1) 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21) 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로 패주 하고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동군에 잡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점심이 넘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오오타니 요시쓰구(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죽음으로 형세는 어이없게 동군에게 유리하게 되어, 차례로 서군은 패주합니다.(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오오타니군 다음에 무너진 것은 고니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부키산의 쪽으로 도주했습니다.(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그 다음은 최초부터 후쿠시마 마사노리 군과 일진일퇴의 호각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우키타군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의 배반에 격노하고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형세가 나빠진 것을 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0) 이야에스, 오츠성에 들어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20) 이야에스, 오츠성에 들어가다 게이쵸 5년(1600년) 9월 20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츠성(大津城)에 입성 했습니다. 카가의 마에다 토시나가였습니다. 그를 겨우 무찌른 서군(아사이나와테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다카쓰구는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쓰구에게서 요청이 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나는 미노로 향하므로 그쪽으로 와주게'라는 것이었습니다. 기후성이 함락된(기후성 공방전)것을 알게 된 서군은 요시쓰구나 다카쓰구를 그쪽으로 파견해 도쿠가와의 군세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카쓰구는 회군해 버립니다.(다카쓰구의 회군) 이에 서군은 그를 일벌백계로 삼기 위해 공격..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9) 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19) 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진 서군에 속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부키산(伊吹山) 속에서 잡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의 일 세키가하라의 촌장 린조우주(林蔵主)가, 이부키산속을 걷고 있저, 약간 먼 곳에서 '여보시오. 이리 와 주시오.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도망자였습니다. 4일전의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큰 전투가 있어, 근처는 그물 처럼 둘러쳐진 도망 무사 사냥으로 삼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때주위 마을의 태도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도망치는 무사 사냥에 참가해 포상을 받는지, 혹시모를 화를 입지 않기 위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입니다. 린조우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