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겐페이 쟁란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2) 사토 츠구노부 전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2) 사토 츠구노부 전사 분지 원년(칸랴쿠 4년 1185년) 2월 19일은, 겐페이 쟁란 굴지의 전투 '야시마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가들을 통솔하는 겐지의 동량이기에, 조직의 견고함을 위해 자신의 허락 없이 관위를 받거나 승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그와 상의를 하지 않고 독단으로 요시츠네에게 관위를 제수해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동생이라고 봐주면 기강이 헤이해 지지요. 즉시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토벌군의 대장에서 제외해 다른 동생인 노리요리(範頼)를 서쪽으로 향하게 합니다. 한편, 타이라 가문은 이치죠다니에서 패배해 시고쿠의 야시마로 도망쳐, 제 81대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즉위시킵니다. 9월에는 ..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야시마 전투(1)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야시마 출항 분지 원년(1185년) 2월 16일 미나모토군의 대장에 복귀해, 타이라 토벌을 목표로 하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불과 하룻밤에 배로 바다를 건너, 타이라가 진을 치는 야시마로 향했습니다. 히요도리고에 기습(히요도리고에 기습)을 성공시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가 교토에 개선 한 것은, 전투로부터 2일 후의 캰라쿠 3년(1184년) 2월 9일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교토에서는 이치죠다니 전투의 결과가 도착해 있었는지 교토에서 들어온 키소노 요시나카가 영화가 다한 타이라에 승리했을 때의 대환성에 이은 환성이 울려 퍼집니다. 이 때, 요시츠네은 아직 26세입니다. 자신을 우러러보는 교토 백성들에게 우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것이 '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1) 히요도리고 절벽 기습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1) 히요도리고 절벽 기습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칸랴쿠 3년(1184년) 1월 16일, 오미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게 동국에서 대군이 파견되어 왔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호쿠리쿠를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쇼군에 오르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쇼군에 오르다 칸랴쿠 원년(1184년) 1월 11일, 키소(미나모토)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쇼군에 올랐습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쇼군'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입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에조(蝦夷)를 정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정규적으로 있는 직책이 아니라, 정벌을 위해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직책입니다. 이 직책은 '정벌'이 목적이기에 무가들을 이끄는 병권을 틀어쥔 직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 당분간 공백이었던 이 자리는 여기서 '무사의 동량(武士の棟梁)'의 명칭으로 '쇼군'의 이름이 부활하게 됩니다. 불과 십년 뿐이기는 했지만 키소노 요리카는 쇼군에 올라 '사마노카미 겐이요노카미 오사히쇼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左馬頭兼伊予守朝日将軍源義仲)를..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지에이 2년(1183년) 11월 1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고세 호주지덴(法住寺殿)에 방화해,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유폐 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지에이 2년(1183년) 윤 10월 1일, 서쪽 지방으로 도망친 타이라와 그 추토를 명령받은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싸운 미즈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수도에 들어가, 동시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타이라 추토의 선지(平家追討の院宣)'를 내렸습니다. 호쿠리쿠에서 타이라군에 대승리한(구리가타토우케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호쿠리쿠에서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히 교토에 들어간 것은, 타이라가문이 교토에서 탈출한(타이라 가문 교토를 떠나다) 뒤로 3일 후인 7월 28일의 일이었습니다. 호쿠리쿠군을 한번 보려고 울타리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새로운 교토를 만들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타이라 가문이 밀려나고 무엇인가 바뀐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