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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교토 점령, 세차례에 걸친 교토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교토 점령, 세차례에 걸친 교토 전투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6월 30일 아시카가 타카우지로부터 교토 탈환을 시도한 닛타 요시사다등 고다이고덴노 측이 패배하는 교토 전투가 있었습니다.



고다이고덴노



 함께 가마쿠라막부를 무너뜨렸지만(가마쿠라막부 멸망), 고다이고덴가 연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갈등이 시작됩니다. 결국, 둘은 싸우게 되어 큐슈로 도망쳤던 타카우지는 재기해 교토로 향합니다.(타카우지 상경) 연전연패하는 덴노군에 당황한 고다이고덴노는 구노스키 마사시게를 불렀습니다. 마사시게는 교토로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제의합니다만, 덴노가 정의롭지 못하게 도망칠 수 없다며 기각합니다. 이에 마사시게는 죽음을 각오해 겐무 3년 5월 15일 요시사다가 있는 효고로 향해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요시사다도 철퇴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형세가 불하다고 본 고다이고덴노는 또 다시 히에이잔으로 몸을 숨깁니다. 이 때, 동행한 덴노 가문의 사람들은 고후시미인(後伏見院), 하나조노인(花園院), 토요히토 친왕(豊仁親王) 등이었습니다. 단, 그의 황태자인 코우곤인(光院)은 히에이잔에 가지 않고, 토우지로 이동했습니다. 코우곤인은 가사기산에서 군사를 일으킨 고다이고덴노가 패배해 오키로 이동했을 때, 막부에 의해 옹립되었던 덴노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 사태에서도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 선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곤덴노



 이 코우곤인이 머무는 토우지를 황궁으로 한 타카우지는 스스로 관군을 자칭합니다. 그가 바로 고곤덴노로 북조 초대의 덴노입니다. 교토를 제압한 타카우지에 대해, 히에이잔에 있는 고다이고덴노 측은 두번에 걸쳐 교토로 진공을 시도합니다만, 모두 실패합니다. 히에이잔의 요청해 의해 코호쿠지가 덴노측에 참전해 사기가 높아지자, 겐무 3년 6월 30일 세번째로 교토를 공격했습니다. 두개의 부대와 별동대로 나뉘어진 고다이고덴노 측은 북 시라카와에 오른 불길을 전투의 신호로 착각한 별동대가 토우지의 남대문에 먼저 공격을 하게 되어, 타카우지의 부하 토키 손코우(土岐存孝)의 아들 아쿠겐타(悪源太)로 불리는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가 적을 무찔러 별동대는 철되합니다.


 이를 모르는 고다이고 덴노군은 2만의 군세를 인솔해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에 맞아 싸우는 타카우지 군은 20만[각주:1] 이 맞붙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투에서 적에게 설욕을 하려는 요시사다가 직접 파고들어 '이 화살 받아 보아라!'라며 아시카가 타카우지에게 화살을 발사합니다. 이에 타카우지는 '나는 덴노에게 모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를 베고 싶다면 직접 와라!'라며 대장끼리의 일기토가 성사될뻔하나, 중신들의 제지로 성사되지는 못합니다. 요시사다는 목숨을 걸고 적군에 삼켜져 갑니다. 이 전투에서 고다이고덴노를 구하기 위해 '산보쿠 잇소우(三木一草)'가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유우키 지카미츠(結城親光), 치구사 타다아키(千種忠顕)와 나와 나가토시(名和長年)가 전사 했습니다. 한편, 요시사다는 어떻게든 살아 남아 도망쳐 사카모토로 향합니다.

  1. 「태평기(太平記)」의 기록이므로 진위는 믿을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