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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고다이고덴노의 겐무의 신정 시작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고다이고덴노의 겐무의 신정 시작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호조 다카토키 일족 멸망의 소식을 은 고다이고덴노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일련의 겐무의 신정이 개시됩니다.


 가마쿠라막부 정권에서 그 세력을 자랑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일족은 이슬과 함께 사라졌습니다.이 소식을 은 고다이고덴노는 즉시 호키 센죠우산(船上山)을 출발,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그는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로쿠하라탄다이가 함락된 시점에서, 코우곤덴노(光厳天皇)를 내쫓아, 사실상 정권을 탈취하고 있던 고다이고덴노는 조속히 논공행상을 함과 동시에, 원정(院政)도, 섭관 정치(摂関政治)도, 막부도 부정한 '겐무의 신정'을 개시합니다. 우선은, 개점휴업 상태이던 나카쓰카사쇼(中務省)등의 8성을 부활시키고, 장관으로 상급 귀족들을 임명합니다. 



고다이고덴노



 중앙 기관으로는 일반 정무를 해내는 기로쿠도코로(記録所), 교토의 경비를 담당하는 상황의 처소를 지키는 무샤도코로(武者所), 문자 그대로 은상을 관리하는 온쇼도코로(恩賞所), 판결을 내리는 사츠쇼게츠단쇼(雑訴決断所)를 두고 지방에는 수호(守護)와 쿠니시(国司)를 병설했습니다. 게다가 중요한 거점인 관동에는, 관동 8개국과 이즈, 가이를 통치하는 가마쿠라 쇼군부(鎌倉将軍府)를 두어, 그 장관으로 고다이고덴노의 황태자인 나루요시 친왕(成良親王), 보좌로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를 임명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거점인 토호쿠에는 무츠쇼군부를 설치해, 장관으로 노리요시 친왕(義良親王)을 임명해, 그 보좌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균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겨났습니다.


 원래 고다이고덴노와 공가(公家)가 목표로 하는 것은, 엔기(延喜), 덴랴쿠(天暦)에 행해진 덴노와 공가의 정치였습니다. 하지만 함께 게릴라전을 전개한 악당들을 통솔하는 모리요시 친왕이 목표로 하는 것은 혁신적인 정치였습니다. 그리고 타카우지로 대표되는 무사 세력 무공에 알맞은 은상을 무가에게 주는 신정을 요구합니다. 결국 불과 1주일 후의 6월 13일 모리요시 친왕이 정이 대장군 즉, 쇼군에 임명됩니다. 하지만 이 인사 자체가 무리한 것이였기에 결국 고다이고덴노의 명령으로 인해 모리요시 친왕은 유폐되어 버립니다. 



니죠가와라의 낙서



 게다가, 공가의 일만 생각하는 신정은 궁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가치가 떨어진 지폐를 발행하거나 무사에 대해 과잉인 노동을 요구하거나 해, 무사나 서민의 불만은 더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또, '토지 소유권의 관리에는 윤지가 필요하다'는 법령까지 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윤지를 요구해 사람이 바글바글 교토에 모여 교토는 복잡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혼란상은, 신정 개시의 다음 해 8월에 등장한 '니죠가와라의 낙서'에 보기 좋게 풍자 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