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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6일,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최대의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鴫野, 今福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 반단 에몬(塙団右衛門)이라는 명장들이 잇달아 오사카성에 결집합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10월 1일에 교토 죠시다이(所司代)[각주:1]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勝重)에게서 오사카 성내의 움직임을 어 에도성의 히데타다에 출진의 준비를 명하는 것과 동시에,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참전하도록 명령을 내려, 스스로는 10월 11일에 500의 수를 따르게 해 슨푸성을 출진합니다. 히데타다도 10월 23일에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향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달인 11월 15일, 니죠성을 출진한 이에야스는 다이와를 거쳐, 후시미성을 출진한 히데타다는 카와치를 거쳐 오사카로 향합니다. 이것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이 발발했습니다.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조각



 도요토미가 숙로(宿老)인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결정으로 농성을 하게 된 오사카 측의약 10만과, 성을 포위한 도쿠가와군 약 20만의 최초의 충돌은 11월 19일에 있었습니다. 바쿠로부치(博労淵)에서 도쿠가와 측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 이케다 타다카츠(池田忠雄) 등이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가 지키는 에다가사키(穢多崎) 성채에 기습을 걸어, 훌륭히 강탈했습니다. 1주일 후인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6일, 가장 격전이 되는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날, 요전날 바쿠로부치와 같이 쌓아 올려진 목책의 격파와 쯔케시로(付け城)[각주:2]의 구축을 목적으로, 야마토가와(大和川)를 사이에 둔 북측의 이마후쿠에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가 인솔하는 1,500의 군세, 그리고 이 때, 남쪽의 시기노에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 있던 것이, 다름아닌 우에스기 입니다. 우에스기가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측에 속해 토호쿠에서 하세도우 전투를 합니다. 즉, 그 세키가하라에서 졌던 것으로, 이후에 이번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어떻게든 이에야스에게 좋은 곳을 보여 조금이라도 만회해 두고 싶었을 것이고, 이에야스도 우에스기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는 5,000의 군사중 800정도를 본진의 방비로 남기고, 나머지의 군사를 4 부대로 나누어 집정 나오에 키네츠구(直江兼続)를 총대장으로 스다 나가요시(須田長義), 야스이 타카모토(安井隆元), 미즈하라 치카노리(水原親憲)을 전선으로 향하게 합니다. 맨 앞장을 서는 우에스기의 후미에는 호리오 타다하루(堀尾忠晴),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 사카키바라 야스카츠(榊原康勝)였습니다. 이에 응전하는 것은, 오사카측의 이노우에 요리츠구(井上頼次)가 이끄는 2,000이었습니다. 하지만 큰 수의 차이는 견딜 수 없어 그는 전사하고, 목책도 파괴됩니다.


 여기서 오오노 하루나가는, 아오키 카즈시게(青木一重)가 이쓰는 1만 2000의 원군을, 곧 바로 오사카 성에서 파견합니다. 이번에는 우에스기 군의 최전선에 있던 스다 부대가 고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빠르게 야스이 부대가 총으로 원호 사격해, 한층 더 미즈하라 부대가 창으로 원조합니다. 이 제휴공격에 의해 오사카 측의 원군을 성공적으로 패배시켜 시기노의 점거에 성공했습니다. 이 우에스기의 전공을 듣고 이에야스는 '수고했다. 호리오 부대와 교대하라.'고 지사합니다.


 하지만 키네츠구는 '생명을 걸어 빼앗은 장소를, 명령이라고는 해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없습니다!' 라고 거부해, 우에스기의 고집을 과시하며 야마토가와를 건너, 사타케 군의 원호로 향합니다. 실은 이 때, 이마후쿠의 사타케대가, 오사카 측의 고토 모토츠구, 키무라 시게나리등에 패퇴해 원군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응답해서 야마토가와를 건넌 미즈하라 부대에 의해, 모토츠구는 왼팔에 총탄을 맞게 됩니다. 이에 곧 철퇴하는 고토 부대였지만, 가장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는 시기노에서는 우에스기가, 이마후쿠에서는 고토와 키무라의 명성이 높아지는 5대 5의 무승부가 되었습니다.


 우에스기의 본진에 이에야스가 공을 치하하러 올 때, 키네츠구는 오사카성으로 향해 위협 사격을 실시해 견제했습니다. 시기노의 점거와, 이 견제로 일련의 행동에 감격한 이에야스가, 키네츠구를 격려하자 그는'이런 건 아이의 싸움같은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명의 사망자를 낸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는 이렇게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이 3일 후의 11월 29일에는, 도쿠가와 측이 오사카측의 성채를 탈취하는 노다, 후쿠시마 전투가, 그 5일 후인 12월 4일에는, 반대로, 오사카 측이 도쿠가와분에게 대타격을 주는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1.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차관인 쇼시(所司)의 대리 [본문으로]
  2. 공격, 방어용으로 만든 임시의 성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