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4일, 최초부터 도요토미측이 불리했던 오사카 겨울의 진 중에서, 유일하게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에게 압승한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던 날입니다.
사나다마루의 환상적인 구조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4일의 이른 아침에 전투가 일어납니다. 히코네(彦根)의 이이 나오마사의 가신인 우츠기 야스시게(宇津木泰繁)가 후에 가로에 제출한 전공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며칠이나 양군이 적대하는 사나다마루의 해자 곁에서, 저는 전날부터 야경을 서고 있었습니다. 4일의 아침이 되었으므로, 교대를 위해서 진야(陣屋)로 돌아와, 부하인 아시가루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전투가 시작 되었으므로, 서둘러 아시가루 5명을 거느려 전장으로 향해 갔습니다.
즉, 이 날 기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습 작전을 결행한 것은,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의 군과 마쓰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의 군이었습니다. 마에다군과 마쓰다이라군은 어두울 때 사나다마루의 해자 근쳐까지 이동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나다 유키무라는 사전에 기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리 데마루(出丸) 1 에 많은 활을 준비해, 적이 해자에 돌진하자, 일제히 활을 쏘아 맞혔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사나다마루
그때, 사나다마루의 후방에서, 한명의 군사가 잘못해 화약이 들어간 통에 불씨를 떨어뜨려,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 대폭발을 오사카성에 보낸 스파이의 신호라고 착각 한 마에다, 마쓰다이라 군세는 총공격을 개시해 돌진해 옵니다. 곧바로 앞에 돌진해 오는 병사는 측면에서 표적이 되어 화살을 맞고 쓰러집니다. 잇달아 사나다마루에 해자에 밀려 드는 병사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그 쓰러진 병사 위로 다른 병사들이 진군합니다. 이윽고 시체들로 해자는 마치 평지와 같이 매꿔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진군하는 병사들은 기분이 나쁠 뿐더러, 울퉁불퉁해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름이 있는 무사들도, 지나친 패전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에야스는 분노에 떨려 공격 중지의 명령을 내립니다. 이 싸움으로 마에다 토시츠네의 군사 300명,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군사 480명이 죽고, 그 외의 잡병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위의 보고서를 쓴 우츠기 야스시게의 주군인 이이 나오마사의 군에서도 35명이 전사, 9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사나다 외성의 전투'라 불리며 킨키 지방 내의 꼬마들까지 알 정도로 크게 퍼져, 겨울의 진에서 도쿠가와측 사망자 총수의 5 분의4가 이 날의 싸움으로 죽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 있어서는, 세키가하라의 전투때의 우에다성의 악몽(우에다성 공방전)이 떠올랐을까요? 얼마 뒤 이야에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화목을 제의합니다.
- 외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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