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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인물편/여성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강지처, 오네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강지처, 오네



오네(おね)는 스기하라 사다토시(杉原定利)의 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세를 함께한 조강지처 입니다.



오네(おね)



에이로쿠 3년(1561년) 8월, 아사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시집을 갑니다. 당시에는 보통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오네와 하시바 히데요시는 연애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둘 사이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나 아이가 없어 히데요시나 오네의 친척을 양자나 가신으로 데려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있습니다.


 덴쇼 2년(1574년), 오의 나가하마(長浜) 12만석의 영주가 된 히데요시 아래로 시어머니 나카(仲)와 함께 살게 됩니다. 그 후는 원정으로 나가하마를 자주 비우게 된 남편 대신 성주대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히데요시 아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상담해가면서 성 근처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히데요시의 출세와 함께 그의 여성편력이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한번은 오네가 남편 대행으로 노부나가를 만나 이 고민을 털어놓자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오네만한 여자가 없다'라고 나무라는 한편, 오네에게도 더이상 히데요시가 졸병이 아닌 영주이므로 어느정도 이해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때 노부나가가 써준 편지의 내용이 걸작입니다.


... 이 전 오랜만에 뵈었는데 당신은 더욱 더 아름다워 진것 같군요. 히데요시가 당신에게 여러 불만을 말하고 있다고 하던데 언어도단 입니다. 저 대머리 쥐(=히데요시)가 당신 같은 멋진 여성을 어디에서 만나는 일은 없을 테니, 당신도 아내답게 당당해지고 질투 같은건 그만 하십시오. 이 편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보여 주십시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 때 잠시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영내에 있는 절에 숨었습니다. 얼마 후, 히데요시가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자 다시 나가하마에 돌아와 히데요시와 재회합니다. 그 후, 히데요시와 함께 오사카성으로 이동해 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하며 함께 종3위 키타만도코로(北政所)라는 호칭을 받습니다. 천하인 히데요시의 아내로써 키타만도코로는 조정과의 교섭을 담당하거나 인질로 온 다이묘들의 가족을 감독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어린 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돌봅니다.


 도요토미 정권에서 현모양처로 집안을 다스림과 동시에 영향력 있는 발언력과 높은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회의 선교사들에게 여러 편의를 봐주었는데 이에 대해 루이스 프로이스는 " 관백전하의 아내는 이교도 이지만, 굉장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해결이 안되는 일이 없다 " 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법명, 쿄우다이인(高台院)



 케이쵸 3년(1598년히데요시가 죽자 요도도노(챠차)의 아들 히데요리의 후견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자신에 비해 아들을 낳은 요도도노에게 경쟁의식이나 질투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케이쵸 8년(1603년), 아사히도노가 죽고 히데요시의 유언이기도 한 히데요리와 센히메(千姫)의 결혼을 지켜보고 난 뒤 머리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됩니다. 법명은 쿄우다이인(高台院)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천하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의 유력가신을 자신의 편으로 삼으려 키타노도코로에게 부탁합니다. 후에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실질적으로 어머니인 그녀에게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느냐 묻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야에스를 도우라 합니다. 이것을 요도도노(챠챠)에 대한 복수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사실 협력관계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덕분인지 그녀는 뒤에 에도막부에서도 많은 대우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