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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인물편/여성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코가쿠보의 마지막 자존심일까? 아시카가 우지히메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코가쿠보의 마지막 자존심일까? 아시카가 우지히메



아시카가 우지히메(足利氏姫)는 코가쿠보의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義氏)와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딸인 조코인(浄光院)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시카가 우지히메(足利氏姫)


 덴쇼 11년 (1583년) 아버지 요시우지가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남이었던 그녀의 동생 우메치요오우마루(梅千代王丸)가 어린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독을 상속하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몇 없었던 여성 다이묘 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9살인데다가 코가쿠보에서 역대 키츠레가와(喜連川)의 당주의 사적과 글을 수집해 놓은 「키츠레가와반감(喜連川判鑑)」에는 남편과 그녀의 일이 게재되어 있지 않기에 형식상으로만 가독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덴쇼 18년 (1590년), 오다와라정벌로 전국 다이묘 후호조가 멸망할 때 코가성(古河城)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코가쿠보관(古河公方館)에 들어갑니다. 


그녀가 평생을 보낸 코가쿠보관 터


 덴쇼 19년(1591년) 당시에 천하를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할아버지 대부터 적대하고있던 오유미쿠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의 손자 아시카가 쿠니토모(足利国朝)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전국시대에 공주들이 정략결혼의 대상이라지만, 자신의 가문도 아닌 남의 가문에게서 명을 받아 적대하는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다니 그녀의 기분은 짐작조차 못하겠네요.


 아무튼 이로인해 80년 만에 갈라졌던 아시카가가문이 통일됩니다. 히데요시는 이때 시모쯔케(下野)의 기쓰레가와(喜連川) 400관(貫)을 주었지만, 우지히메는 코가ㅁ쿠보관에서 계쏙 거주합니다. 분로쿠(文禄) 2년(1593년) 남편 쿠니토모가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하러 갔다가 병사해 그의 동생인 키쯔레가와 요리우지(喜連川頼氏)와 재혼하고 아들 요시치카(義親)를 낳습니다.

 

 요시치카의 탄생과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요리우지는 가쓰레가와 4500석을 안도 받습니다. 그리해서  가쓰레가와 유역을 다스리게 되지만, 우지히메는 변함없이 코가쿠보관에서 계속 살다 겐나 6년(1620년)에 47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아들과 손자도 계속해서 코가쿠보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가문의 원수 가문과 두번이나 결혼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게 된 우지히메가 코가쿠보관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이 아니었을런지요. 그녀는 끝까지 코가쿠보의 핏줄로서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지켰던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