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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전국 통일에 나서다, 기슈정벌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전국 통일에 나서다, 기슈정벌



덴쇼 13년(1585년) 3월 21일, 하시바 히데요시가, 키이(紀伊)에 진격해 기슈 정벌을 개시했습니다. 


키이의 위치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장손인 산포시를 후계로 세워 그 후견인이 되고 실권을 잡는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 도쿠가와 이야에스 등과 항쟁을 하나 결국 승리합니다. 이때 히데요시를 괴롭힌 세력 중 하나가 당시에 자치구와 같은 상태가 되어 있던 키이였습니다. 전투때에는, 네고로지(根来寺)를 중심으로 하는 네고로중과 키이에 뿌리를 두는 사이가중 그리고 오오타당(太田党)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에야스의 요청에 답해, 오사카에서 게릴라적인 테러 행위를 실시하거나 히데요시 측의 키시와다성(岸和田城)을 공격하거나(키시와다성 공방전) 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 그 후, 전투의 결착이 붙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노부오가 단독으로 강화를 해 버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는 승패가 애매한 채 막을 내려 버립니다.(고마키나카쿠테의 종결)


네고로지의 모습


 종전 다음 해가 되어 아키의 모리 데루모토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참전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그 보복으로 키이에 손을 뻗습니다. 덴쇼 13년(1585년) 3월 21일, 데루모토과 다카카게의 수군이 기슈해에서 이동하는 중에, 히데요시는 6만(10만이라는 설도)의 대군을 인솔해 진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센슈 센고쿠보리성 전쟁(千石堀城)을 점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네고로중은 이즈미 하타케나카성(畠中城)에 불을 지르고 퇴각합니다. 하시바군은 그 기세를 몰아 차례차례 성채를 점령하며 진군 해 갈 것입니다. 그 사이에 원래 내분이 있었던 사이가중을 자신의 편으로 돌려 23일에는 네고로중의 본거지 네고로지에 불을 질러 토벌합니다. 방사(坊舎) 2700에 승려 6천 여명이 있던 네고로지는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주지인 겐유(玄宥)는 코노야마로 간신히 도망칩니다.



나름 견고한 성이었지만, 수공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오타당뿐입니다. 오오타당의 무사 천명에 백성을 합해 3천의 사람이 있는 키이 오오타성(太田城)을 드디어 하시바의 대군이 둘러쌉니다. 공성전은 히데요시의 우수 분야입니다. 게다가 오오타성은 기노카와(紀ノ川) 협곡에 구축된 히라죠오(平城)입니다. 예전에 빗츄 타카마츠성을 공략할 때 썼던 '수공(水攻め)'을 여기서도 사용합니다.(타카마츠성 공방전) 아카시 노리자네(明石則実)는 3월 25일부터 제방의 구축을 개시해, 높이 3 m~5 m, 연장 6 km에 미치는 제방을 불과 6일만에 완성시킵니다. 때마침의 비도 와 오오타성은 물속에 가라앉아 버립니다.


 여기에 배로 공격하는 하시바군과 게릴라처럼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전복시키는 오오타당의 전투가 이어졌으나   고립한 성에서 농성 하는 것에는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이윽고 4월 22일, 오오타 성주 오오타 사콘(太田左近)은 항복해 그를 위시한 50명 남짓이 할복 하고 오오타성은 개성 됩니다. 이로서 히데요시의 기슈 정벌은 종료했습니다. 그런데, 히데요시에 의해서 불타버린 네고로지는 후에 천하를 잡은 이에야스는 네고로지를 부활시켜 줍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다음에 포스팅할 때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