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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8) 고마키나카쿠테의 종결, 히데요시와 이야에스의 회담

일본 전국시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8)

고마키나카쿠테의 종결, 히데요시와 이야에스의 회담



 덴쇼 12년(1584년) 11월 16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오가 하시바 히데요시와의 무단으로 화목해 버리자 진을 철수하고 하마마츠로 향했습니다. 


 덴쇼 12년(1584년) 3월 13일, 히데요시 산하의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이누야마성 공략(이누야마성 공방전)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노부오와 연합한 도쿠가와와 기나이를 지배하는 히데요시의 전투는 이기는 쪽이 천하를 노리게 될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무장들도 이 사실을 알기에 도쿠가와에 붙을 것인가 히데요시에 붙을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차녀 도쿠히메(督姫)를 신부로 주어 동맹을 맺고 있던 관동의 호조 우지나오로(北条氏直)의 원군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기슈의 네고로중 이나 사이가중과는 동맹을 맺어, 기나이에서 게릴라전에 골치를 썩히던 히데요시는, 전투의 발발 후에도 오사카성에서 쉽사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구로에서 패전(하구로 전투) 뒤에 히데요시 스스로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진군합니다. 그리고 양군은 코마키에서 대치합니다. 4월에는 나가쿠데 전투로 히데요시는 또다시 대패합니다.(나가쿠데 전투)그리고 나서 양군은 코마키에서 계속해서 대치를 하지요. 그러나 이 전투들은 각지에 퍼져, 지방 영주들의 대치도 불러 옵니다.(스에모리성 공방전)


오다 노부오(노부카쓰)

 5월 1일 히데요시는 본진을 퇴거하고 이에 노부오도 5월 3일에 코마키산의 진을 물러나, 이세로 돌아갔습니다. 히데요시는 주력 부대를 본진이 있던 가쿠덴에 남긴 채로 이에야스를 묶어 두고, 스스로는 오사카로 돌아가는 길에 미노에 있던 노부오 산하의 지성인 카가노이성(加賀井城), 타케가하나성(竹ヶ鼻城), 오쿠성(奥城)을 점령해 노부오에 위기감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6월 15일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구키 요시타카에게 카니에성을 공격하게 해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합니다. 이에야스에 의해서 곧바로 탈환되긴 합니다. 6월 28일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돌아왔지만 8월 16일에는 히데요시는 다시 출진합니다. 아마 이즈음부터 히데요시는 노부오와 강화의 교섭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 같습니다.


 9월 2일에는 강화가 성립될것 같아 보였습니다만, 결국 결렬됩니다. 이에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 명해 노부오 의 코즈쿠리(木造)가가 지키는 베키성(戸木城)을 공격시킵니다. 이 성도 결국 점령당해, 노부오는 꽤나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11월에 들어가 강화의 교섭이 진전되어 11일에는 거의 결정되어, 덴쇼 12년(1584년) 11월 15일에, 쿠와나 부근에서 행해진 노부오와 히데요시의 회견에서 노부오는 히데요시에 인질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오와리의 이누야마성과 카와다성을 주고, 그 대신에 히데요시는 북 이세의 4군을 노부오에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정식으로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이상한 점을 느끼셨나요? 그렇습니다. 이야에스는 이 회담장에 없었습니다.



오기마루(후의 유키 히데야스)



 아직, 이에야스는 코마키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즉 노부오는, 이에야스와는 상담하지 않고 마음대로 히데요시와 강화해 버렸다라는 것입니다. 또는 이야기는 했지만, 이야에스가 반대해 단독으로 강화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11월 16일, 정식적으로 강화 성립 소식을 들은 이야에스는 대의명분을 잃어 진을 철수하고 하마마츠로 돌아갔습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사이에서는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於義丸: 후의 유우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는 일로 강화가 성립되어 여기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듭했으나, 노부오의 배신과도 같은 강화로 얻은 것이 없었지요. 이런 도쿠가와의 강화소식을 듣고 호쿠리쿠에서 싸우고 있던 삿사 나리마사는 결사의 각오로 산을 넘어 이야에스를 찾아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