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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7) 지방에 번진 전투의 불길, 스에모리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7)

지방에 번진 전투의 불길, 스에모리성 공방전



 덴쇼 12년(1584년) 8월 28일, 도쿠가와 측에 속한 삿사 나리사마(佐々成政)가, 하시바 측에 속하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아사히산(朝日山) 성채를 공격해, 호쿠리쿠에서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의 불똥이 튄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삿사 나리마사



 덴쇼 12년(1584년) 3월 13일, 히데요시 산하의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이누야마성 공략(이누야마성 공방전)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노부오와 연합한 도쿠가와와 기나이를 지배하는 히데요시의 전투는 이기는 쪽이 천하를 노리게 될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무장들도 이 사실을 알기에 도쿠가와에 붙을 것인가 히데요시에 붙을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차녀 도쿠히메(督姫)를 신부로 주어 동맹을 맺고 있던 관동의 호조 우지나오로(北条氏直)의 원군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기슈의 네고로중 이나 사이가중과는 동맹을 맺어, 기나이에서 게릴라전에 골치를 썩히던 히데요시는, 전투의 발발 후에도 오사카성에서 쉽사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구로에서 패전(하구로 전투) 뒤에 히데요시 스스로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진군합니다. 그리고 양군은 코마키에서 대치합니다. 4월에는 나가쿠데 전투로 히데요시는 또다시 대패합니다.(나가쿠데 전투)그리고 나서 양군은 코마키에서 계속해서 대치를 하지요. 그러나 이 전투들은 각지에 퍼져, 지방 영주들의 대치도 불러 옵니다.



스에모리성 모식도



 그 중 하나가 이번 포스팅 할 스에모리성 공방전입니다.  삿사 나리마사는  8월 28일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사히산 성채를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하지만 당일은 호우 때문에 일단 공격을 중지해 다음에는 토시이에의 성인 스에모리성(末森城)으로 타겟을 변경합니다. 노토의 남부에 위치하는 스에모리성은 카가와 엣츄의 국경에에도 가까워 토시이에에게는 매우 중요한 성입니다. 9월 9일경 나리마사는 성에 맹공격을 개시합니다.  그의 군세는 총원 5천 남짓 한편, 스에모리성을 지키는 것은 토시이에의 중신인 오쿠무라 나가토미(奥村永福)가 이끄는 1,500 정도 뿐입니다. 노도와 같이 밀려 드는 나리마사군에 얼마안되는 군사로 견디던 나가토미였지만, 역시 수의 차이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