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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수도에 들어가, 동시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타이라 추토의 선지(平家追討の院宣)'를 내렸습니다. 호쿠리쿠에서 타이라군에 대승리한(구리가타토우케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호쿠리쿠에서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히 교토에 들어간 것은, 타이라가문이 교토에서 탈출한(타이라 가문 교토를 떠나다) 뒤로 3일 후인 7월 28일의 일이었습니다. 호쿠리쿠군을 한번 보려고 울타리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새로운 교토를 만들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타이라 가문이 밀려나고 무엇인가 바뀐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5일, 타이라 가문이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받들어 교토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호쿠리쿠 전투에서의 타이라 가문의 대패는, 교토에도 전해지고 있었습니다.(구라가타토우케 전투) 드디어 미나모토가 공격해 오는 것은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교토 내의 집들은 문뿐만 아니라, 창문도 닫고 안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고합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조속히 타이라 가문을 단념하고, 24일에 고쇼(御所)를 빠져 나가 히에이잔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교토에 올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타이라 가문은 부득이 법황의 동행을 포기하고, 겐레이 몬인 토쿠코(建礼門院徳子)에 안긴 6세의 안토쿠덴노를 데..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4) 시노와라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카라토우케 전투(4) 시노와라 전투 주에이 2년(1183년) 6월 1일 타이라 가문이 교토에서 도망가는 원인이 되는 '시노하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기 때문에 앞의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타이라 측으로 배신한 에치젠 헤이센지의쵸우리 사이메이(長吏斎明)의 안내로 엣츄 젠지 세이슌(越中前司盛峻)에게 5천의 군사를 붙여 엣츄로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와 전투가 일어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가타토우케 전투(3) 구리가타토우케 전투 발발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가타토우케 전투(3) 구리가타토우케 전투 발발 지에이 2년(1183년) 5월 11일, 미나모토가 타이라를 역전하는 키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구리카라토우케(고개)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기 때문에 앞의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주에이 2년(1183년) 5월 9일, 호쿠리쿠에 쳐들어온 타이라 군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 군의 선발대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의 군세가 한야노에서 격돌한 '한야노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3) 요코타 강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3) 요코타 강변 전투 지쇼5년(1181년) 6월 14일, 타도 타이라의 기운이 강해지는 중에, 호쿠리쿠에 요시나카의 이름을 널리 알린 요코타 강변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신슈의 반 타이라 무장들을 아군으..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지쇼5년(1181년) 3월 16일, 겐페이 전투에서 얼마 안되는 타이라의 대 승리인 전투 스노마타가와 전투(墨俣川の合戦)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이로인해 후쿠하라로 천도했던 키요모리는 다시 수도를 헤이안쿄로 재천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동국의 무장들은 '타이라 가문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1) 나라 토벌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1) 나라 토벌 지쇼4년(1180년) 12월 28일, 타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의 나라 토벌이 있었습니다. 타이라노 시게히라는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5남입니다. 오와리의 스노마타 전투나 미즈시마, 무로야마 전투 등, 후에 포로로 잡히는 이치노타니 전투 이외에는 전승의 무용이 뛰어난 무장입니다. 그 용모는 모란의 꽃에 비유되는 미남으로, 성격도 섬세했던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타이라쪽 기록인 「타이라 가문 이야기」뿐만 아니라, 미나모토 측의 기록에도 그에 대한 칭찬이 쓰여있는 걸 보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나라를 토벌해야 했을까요?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0) 후쿠하라 천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0) 후쿠하라 천도 지쇼4년(1180년) 11월 26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결단에 의해 후쿠하라(福原)에서다시 교토로 천도하게 됩니다. 크게 보기후쿠다이라의 위치 제 80대 다카쿠라덴노(高倉天皇)에게 시집간 딸 토쿠코(徳子)가 차기 덴노인 사내 아이를 낳아, 영화의 정점에 닿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였지만 이 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로 걷기 시작합니다. 키요모리의 독재에 조정은 서서히 불만을 드러내 오기 시작합니다. 이 지쇼4년은 일본 역사의 변환기였습니다. 전년 지쇼 3년(1179년) 8월 1일, 키요모리의 폭주를 멈추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던 키요모리 아들 시게모리(重盛)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번 중병을 겪은 키요모리는 후쿠하라에 별장을 지어 아들들에게 정..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지쇼4년(1180년) 11월 4일, 후지가와 전투에 이어 겐페이 전투로 킨사죠 전투(金砂城の戦い)가 발발했습니다. 전년의 11월에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 하고 그의 원정을 멈춘 뒤에 법황의 신하나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버렸습니다. (지쇼 3년의 정변) 이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다음 해의 4월에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해(타이라 토벌의 영지) 8월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깁니다.(요리토모 발기) 관동지방에서 반 타이라를 부르면서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정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스스로의 적손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지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