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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뒤, 쿠도산(九度山)에 추방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탈출해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반나절만에 결착납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로 향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 유키무라 부자 3명입니다만, 시모우치 이누부시의 숙소에서 미쓰나리의 밀서를 받은 뒤에, 형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붙어 그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합류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어 거성인 시나노 우에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오야마에서 회군한 이야에스의 동군 중, 히데타다는 나카센도우에서 서쪽으로 향해 진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7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립한 교토 호코지 종명에 트집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호코지 종명사건) 이에 도요토미 측은 분노하지만, 아직 전투의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많이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유산으로 료닌들을 고용해 무기의 준비도 시작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었지요. 이에 도쿠가와 가문의 파이프역이기도 한 이바라키성(茨木城) 성주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가 변명을 위해 슨푸로 향했습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그 이름을 달린 '시즈가타케 칠본창'(시즈가타케 전투)의 한 명입니다. 히데요시의 사후는 히데요리의 모리야꾸(傅役:스승역)를 맡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리 산하였기에 서군에 섰습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게이쵸 17년(1612년) 3월 21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가 화형에 처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크리스천)을 금지했습니다. 게이쵸 14년(1609년)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에 기항하고 있던 일본의 무역선에 승선하고 있던 뱃사람들이, 포르투갈선의 선원들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해 큰 싸움의 끝에, 50명 정도의 뱃사람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본의 무역선은 히젠 히노에번(日野江藩)의 배였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빠르지 않아 일본인들은 아직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수개월의 뒤, 1척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들어 옵니다. 정확히 그 무렵, 다른 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게이쵸 14년(1609년) 4월 5일, 사츠마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부하인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를 총대장으로 류구(琉球)에 침공합니다. 쇼 네이(尚寧)가 항복해, 류구국(琉球国)은 멸망했습니다. 류큐 왕조의 혈통은 15세기 경에 처음으로 류큐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쇼(尚)에서 시작됩니다. 그 이후 그의 혈통은 7대를 이어지다가, 분메이 2년(1470년)에 쇼 엔(尚円; 内間金丸)이 수립하는 제 '2대 쇼'로 나누어집니다. '1대 쇼'의 제6대 왕 쇼 다이큐(尚泰久)의 신하로 출세한 엔이, 제7대 쇼 토쿠(尚徳)가 죽은 것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 '2대 쇼'의 6대 쇼 에이(尚永)의 뒤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게이쵸10년(1605년) 5월 1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경을 재촉했으나 히데요리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게이쵸5년(1600년)이고, 오사카의 진의 발발이 게이쵸 20년(1615년)입니다. 이 사이에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지금에야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은 세키가하라를 엄청난 분수령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 내에 실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대로 중 가장 큰 힘을 가졌음에도, 직접 전투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발한 것입니다. 만약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였다면,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이 그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와 우에스기의 싸움, 마츠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와 우에스기의 싸움, 마츠가와 전투 게이쵸6년(1601년) 4월 26일, 시라이시성(白石城)을 출진한 다테 마사무네와 맞아 싸우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무장등이 부딪친 마츠가와 전투(松川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같은 날에,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참모 나오에 키네츠구가 동군에 속하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영지로 침공해 토호쿠의 세키가하라라고 불리는 하세도우 전투(하세도우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하 판가르는 세키가하라가, 불과 반나절에 결착이 나 버립니다. 이에 부득이 하세도우성을 점령하지 못한 채, 우에스기군은 요네자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토호쿠에 있어 동군은 모가미만이 아닙니다. 사실 모가미라면 우에스기의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결백 증명 쿠루메성, 야나가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결백 증명쿠루메성, 야나가와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10월 20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치쿠고 쿠루메성(留米城)을 공격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의 손자 오노 시게유키(小野鎮幸)와 싸웠습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사가 나베시마번의 선조가 되는 인물입니다. 원래 가마쿠라 시대에 다자이후(大宰府)의 쇼니(少弐) 직을 명령받은 일로 쇼니라 자칭한 쇼니 가문의 후예이고, 히젠 나베시마에 정착해, 그 지명을 성으로 삼은 나베시마 가문은 나오시게의 조부 나베시마 키요히사(鍋島清久)의 시대에,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를 궁지에서 구했습니다. 이후 류조지 가문의 가신이 되어, 두각을 나타내 갑니다. 나베시마가문을 중용 한 이에카네는 손녀 토우겐인(桃..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2) 서군의 거물들 처형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22) 서군의 거물들 처형당하다 게이쵸5년(1600년) 10월 1일, 앞의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패자가 되어, 그 후, 잡힌 이시다 미쓰나리등 세 명의 처형을 했습니다. 요전날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뒤에 도주해, 이부키산에서 잡힌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안코쿠지 에케이의 세명의 처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으므로 할복하지 못하고 자수 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는 왜 할복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를 교토까지 호송한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도중에, '전투에 진 이상, 깨끗하게 할복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바보 취급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21) 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21) 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로 패주 하고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동군에 잡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점심이 넘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오오타니 요시쓰구(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죽음으로 형세는 어이없게 동군에게 유리하게 되어, 차례로 서군은 패주합니다.(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오오타니군 다음에 무너진 것은 고니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부키산의 쪽으로 도주했습니다.(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그 다음은 최초부터 후쿠시마 마사노리 군과 일진일퇴의 호각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우키타군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의 배반에 격노하고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형세가 나빠진 것을 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