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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 전국시대; 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일본 전국시대;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덴쇼 14년(1586년), 토시야스 칠철(利休七哲)의 한 명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만큼 전국시대에서 독특한 처세술을 선택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주군 이케다(池田)가의 내분을 이용해, 이케다 가츠마사(池田勝政)를 코노야마에 추방하고 이케다가를 빼앗습니다. 그 후, 이케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다(和田)가와 이타미(伊丹)가를 멸하고 셋츠를 통일해 일개 무장에서 다이묘가 됩니다. 마치 사이토 도산을 방불 시키는 하극상을 이룬 그를 오다 노부나가는 장인 생각이 났는지 마음에 들어 해 무라시게를 특별 대우로 스스로의 산하에 맞아들입니다. 무라시게는 겐키 원년(1570년)에 발발한 이시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참모편; 단명한 도라에몽 참모, 만미 시게모토 일본 전국시대 참모편;단명한 도라에몽 참모, 만미 시게모토 덴쇼 6년(1578년)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에서 측근이 되 활약한 만미 시게모토(万見重元)가 아리오카성(有岡城)의 공방전에서 전사 했습니다. 시동에서 시작해 노부나가의 최측근이 되었다고 하는 만미 시게모토, 하지만 그의 기록은 죽기 전의 3년 정도 밖에 없고, 그 대부분이 이번에 쓰는 포스팅에 있는 내용으로 그 이전의 그에 대해서는 수수께끼에 휩사여 있습니다. 단지, 기록들에 아명인 센치요(仙千代)가 적혀 있는 일로 볼 때 어쩌면 꽤 어린 인물은 아닐까합니다. 그는 오다에서 사무적인 일들을 하고 있엇습니다. 시전(矢銭: 국방비)의 징수에 관한 지시를 내리거나 노부나가에게 내방한 사자의 대접을 하거나 노부나가가 좋아하는 스모 대회를 기획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카가 잇코우 잇키의 종결, 토리고에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카가 잇코우 잇키의 종결, 토리고에성 공방전 덴쇼 8년(1580년) 아직 남은 카가 잇코우 잇키의 거점 토리고에성을 시바타 가쓰이에가 함락 시켰습니다. 장장 10년에 걸쳐 전개된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전투는 한 때 우에스기 겐신이 참여하거나 모리의 수군이 진출하거나 아라키 무사시게의 반란 등으로 고생하던 노부나가지만 겐신의 사망, 철갑선의 건조, 덴노의 칙명 등으로 위기를 극복해 냅니다. 그리고 나서 덴쇼 8년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켜 카가의 잇코우 잇키 진압을 명하고, 가나자와고보가 점령당하며(가나자와고보 공방전) 카가와 잇코우 잇키는 일단락 됩니다. 그러나 본거지가 점령당했다고 해서 끝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러 지역에서는 잇코우 잇키의 세력이 발호하고 있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나가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츠츠이가의 본성 츠츠이성(筒井城)의 철거를 명했습니다. 교토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츠츠이 준케이는 노부나가에게서 코오리야마성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다이와의 성을 철거하라는 명을 들어 본성인 츠츠이성으로 돌아옵니다. 그 뒤에 노부나가는 셋츠, 카와치에 있는 성들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준케이는 즉석에서 카와치로 향합니다. 그는 한달이 안되 성의 대부분을 철거해 코오리야마성에 돌아왔습니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은 그의 저서 「타몬인일기(多聞院日記)」에서 이 성의 철거에 대해 매우 놀라움을 표현했는데, 지금봐도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로 성의 철거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 드디어 종결하다 일본 전국시대;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 드디어 종결하다 덴쇼 8년(1580년) 혼간지 켄뇨가 퇴거한 뒤에도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교뇨(教如)가 이시야마 혼간지를 퇴거해 10년에 이르는 이시야마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제11대 법주 켄뇨의 오사카에 위치한 이시야마혼간지는 매우 거대했습니다. 고에이도우(御影堂)를 중심으로 하는 혼간지의 가람들을 일본어 코(コ)의 글자처럼 6개의 혼간지 내의 마을들이 둘러싸, 각각의 마을은 혼간지에 세금을 납입하는것 외에는 자유로운 자치 제도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어, 그 주민은 1만명을 넘는 수였다고 합니다. 천하를 노리는 노부나가에게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는 혼간지와 그 문도들은 골칫거리였지요. 게다가, 혼간지 신자에 의한 잇코우 잇키는 농민이 죽창을 든 오합지졸이 아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분나가, 카가 잇코우 잇키를 종결시키다 가나자와고보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오다 노분나가, 카가 잇코우 잇키를 종결시키다가나자와고보 공방전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와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카가 잇코우 잇키의 거점 가나자와고보(金沢御坊)에 돌입해 약 100년간 계속 된 카가 잇코우 잇키가 막을 내렸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해 약 2년간에 걸쳐 전개된 후계자 분쟁(미타테의 란)으로 인해 우에스기 산하의 호쿠리쿠의 여러 장군들은 카게카츠와 카게토라의 세력 중 하나에 속해 전투가 있을 때마다 에치고로 향해 가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우에스기는 외적에게서 무방비 상태가 되지요. 노부나가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미타테의 란의 발발 후 불과 1개월 후에는 원래 엣츄(越中) 출신인 진보 나가즈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겐신을 이을 자, 과연 누구인가? 오타테의 란 일본 전국시대;겐신을 이을 자, 과연 누구인가? 오타테의 란 덴쇼 7년(1579년) 우에스기 겐신의 후계자를 두고 오타테의 란이 일어나, 그 최종 결전 오타테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오른쪽부터 카게카츠, 카게토라, 마사시게 덴쇼 6년, 세상을 떠난 우에스기 겐신(겐신 사망)은 비사문천의 화신이여서 그랬는지 여성과 동침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겐신이 여성이었다고까지 말하지요. 아무튼 그에게는 누이 센토우인(仙桃院)의 아이 카게카츠(景勝), 호조 우지마사의 동생 카게토라(景虎), 노토의 하타케야마의 마사시게(政繁), 세 명의 양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경을 결의해 천하를 노리는 겐신은 후계자가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았기에, 후계자 분쟁의 불씨는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하타케야마에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대패한 오오토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시마즈가 기습으로 오오토모의 기세를 꺽은 타카기카와 전투(타카기카와 전투) 후에, 다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의 무모한 돌격으로 인해 미미가와에서 오오토모군은 패퇴하고 맙니다.(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이전까지 큐슈의 소린의 위치는 강대한 것이여서 선교사들은 그를 '분고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그 행동거지는 별로 신실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 건설에 전념하려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이전의 아내와는 결별해 새 아내를 맞이하고, 영주의 자리도 아들 요시무네(義統)에게 양도했습니다. 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소린이 지닌 상태로 주력 부대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3) 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오오토모를 괴멸시키다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3)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오오토모를 괴멸시키다 덴쇼 6년(1578년), 타카기카와 전투로 시작된 오오토모 소린과 시마즈 요시히사세의 미미가와 전투가 본격적으로 겨격화 됩니다. 사츠마, 오스미를 지배하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후유가 남부를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에게 구원을 청해 그것을 듣고 후유가 탈환을 목표로 하는 오오토모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진한 시마즈군이 싸운 미미가와 전투의 처음은 타카기카와의 기습전(타카기카와 전투)으로, 시마즈의 대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미마가와 전투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대패의 반성과 전략 수립을 위해 열린 오오토모군의 군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다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2) 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 타카기카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2)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타카기카와 전투 덴쇼 6년(1578년)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과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의 미미가와 전투의 초전 타카기카와 전투가 있었습니다. 덴쇼 5년(1577년)의 기자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대패를 당해, 휴우가의 남쪽을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구원을 요청해, 시마즈와의 항전을 결의한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은 휴우가의 땅 일부 양도를 약속받아, 크리스찬의 이상향 뮤지카를 지으려 했습니다. 이전의 부인과 이혼하고 크리스천인 새부인 쥴리아를 맞이해 본인도 돈 프란시스코로 개명해, 아들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출진합니다. 소린은 3만 5천의 군세를 해로로 이끌어 용이하게 후유가로 진출해 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