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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 전국시대; 부전자전? 오다 노부타다의 에린지 토벌 일본 전국시대;부전자전? 오다 노부타다의 에린지 토벌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타다가 에린지(恵林寺)가 불에 타, 주지인 가이센 조키(快川紹喜) 등이 죽었습니다. 키요카즈 겐지 유파를 이어받는 토키(土岐) 출신으로 여겨지는 가이센 조키(快川紹喜), 그는 교토의 묘신지(妙心寺)등에서 사사 받아 미노의 소후쿠지(崇福寺)의 주지를 맡은 뒤에 가이의 다케다 신겐에게 초대되어 에린지의 주지가 되어 가이와 미노의 외교 관계 등을 맡은 다케다 측의 승려였습니다. 신겐에게 가이에 초대되기 이전에, 오다 노부나가가 불렀음에도 거절하고 가이에 갔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조키를 싫어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진실은 잘 모릅니다. 아무튼 덴쇼 10년(1582년) 다케다 가쓰요리가 덴모쿠산에서 할복해 다케다가가 멸망합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다군 호쿠리쿠로 진공하다, 우오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오다군 호쿠리쿠로 진공하다, 우오츠성 공방전 덴쇼 10년(1582년) 나카조 가게야스(中条景泰)등이 할복해 우오츠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시바타 가쓰이에등의 오다군 이 호쿠리쿠(北陸)를 제압했습니다.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로 다케다를 물리친(나가시노 전투) 오다 노부나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이었습니다. 겐신은 나나오성을 점령하고(나나오성 공방전) 테도리가와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끄는 오다군을 몰살 시키나(테도리가와 전투), 덴쇼 6년 초 급작스레 죽어(겐신 사망겐신 사망), 그 후계를 놓고 오타테의 란(오타테의 )이 일어나 버립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부나가는 군을 진군시켜 엣츄를 정복합니다. 게다가 덴쇼 8년(1570년)에는, 시바타 가쓰이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다케다가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다케다가 멸망하다 덴쇼 10년(1582년)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 추적당하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가 처자와 함께 가이 덴모쿠산(天目山)에서 할복 했습니다. 덴쇼 3년(1575년)에 일어난 나가시노 전투(나가시노성 공방전)에서 일반적으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이, 가쓰요리가 인솔하는 다케다군에 압승한 것 같이 그려지는 유명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전투가 8시간에 달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한 쪽의 압승이라기 보다는 일진일퇴의 격전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전투로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등 신겐 때 부터의 중신들이 죄다 전사한 것도 사실입니다. 산간벽지 가이에서 발호해 전국 다이묘가 된 다케다 신겐 덕에 가쓰요리는 늘 부담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 다케다를 토벌하다 다카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노부나가 다케다를 토벌하다다카토성 공방전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에 공격받은 니시나 모리노부(仁科盛信)가 분전의 뒤의 할복 해 다카토성(高遠城)이 점령 당했습니다. 덴쇼 8년(1580년), 10년에 걸쳐서 계속 되고 있던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전투(텐노지 전투)에 결착을 붙인 오다 노부나가는 기나이에 적이 없게 되어, 드디어 다케다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덴쇼 9년(1581년)에는, 노부나가와 동맹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령의 서쪽의 요충지 타카마 카미성을 탈취합니다.(타카마 카미성 공방전) 이에 대항하는 다케다 가쓰요리는 본격적으로 신푸성을 구축하고, 고후에서 니라사키로 거점을 옮기고, 군단을 한층 더 강화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타카마카미성을 잃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요다 노부시게, 타나카성의 성문을 열다 타나카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요다 노부시게, 타나카성의 성문을 열다타나카성 공방전 덴쇼 10년(158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공격받고 있던 다케다의 산하 스루가 타나카성(田中城)의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蕃)가 성을 넘겼습니다. 덴쇼 3년(1575년) 나가시노 전투(나가시노성 공방전)로 아버지 신겐의 시대부터의 많은 가신을 잃은 가이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였지만, 아직 스루가의 영지는 건재하고, 서쪽의 요충지인 타카마카미성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덴쇼 6년(1578년) 초에 우에스기 겐신이 죽은 일로 발발한 미타테의 란(미타테의 란)에서 가쓰요리는 호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조와 동맹을 맺은 카게토라가 아닌 카게카쯔를 후원합니다. 물론, 카게카쯔가 준 돈 때문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다케다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일본 전국시대;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덴쇼 18년(1590년) 유럽을 방문해 로마교황에게 알현 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이 8년 5개월만에 귀국했습니다. 덴쇼 10년(1582년) 떠나, 덴쇼 18년(1590년)에 귀국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단'. 이 기간 사이에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어, 시즈가타케의 전투에 승리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태정관의 자리에 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됩니다. 크리스트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노부나가와는 다르게 강력하게 크리스트교를 탄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년사절단이 출발할 때와는 완전히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것입니다. 덴쇼 7년(1579년)에 일본을 방문한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그나노(Valignano)는 덴쇼 10년에 귀국할 즈음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의 성과를 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일본 전국시대;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덴쇼 9년(1581년) 제2차 덴쇼 이가의 란(第二次天正伊賀の乱)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가 공격으로, 마지막까지 남았던 카시하라성(柏原城)이 함락 당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에게는 슷파(出抜),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노키자루(軒猿)라고 닌자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역시 핫토리 한조(服部半蔵)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의 사나다 십용사도 많이 알려져 있지요. 또 호조는 후우마(風魔)가 있었습니다. 여러 닌자들의 이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각 지역의 닌자의 이름)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닌자를 사용한 이야기는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슨 짓이던지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는 노부나가가 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덴쇼 9년(1581년) 모리의 돗토리성(鳥取城)을 하시바 히데요시가 인솔하는 오다의 군세가 포위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 츄고쿠 지방을 공략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6년(1578년) 봄부터, 2년 가까이의 세월을 걸쳐 겨우 벳쇼 나가하루의 거성 미키성을 공략합니다.(미키성 농성전) 미키성을 공략하면서, 히데요시는 타지마나 이나바의 평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미키성이 함락당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당시의 돗토리 성주였던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이나바국의 영지를 보증할 테니 오다측으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야마나 토요쿠니는 오닌의 란에서 서군의 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자손입니다. 이전에는 산인의 수십국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다케다 멸망의 서곡, 타카마 카미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다케다 멸망의 서곡, 타카마카미성 공방전 덴쇼 9년(158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부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가 지키는 토노에(遠江), 타카마 카미성(高天神城)를 점령한 제3차 타카마 카미성 공방전이있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하도 심하게 패하여 아버지의 이름값을 못한다는 혹평을 비하지 못하는 다케다 가쓰요리지만, 사실 영지의 크기 자체만 두고 보면 가쓰요리 때가 조금 더 커졌습니다. 물론, 다케다 신겐이 물려준 강대한 군사력과 탄탄한 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겠지만 말이죠. 어쨌든 이런 가쓰요리의 영지 확대의 상징이 도토미와 스루가의 국경에 있는 타카마 카미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원래 오가사와라(小笠原氏)가의 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덴쇼 7년(1579년), 히젠의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모키를 예수회에 기탁했습니다. 비젠 시마바라의 전국 다이묘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의 차남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오오무라가의 양자가 된 것은 불과 4세 때였습니다. 당시, 시마바라 반도에는 몇개의 가문이 있었지만 그 세력이 커봐야 쿠니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가만은 시마바라 반도 일대에 자랑하는 세력을 가지는 영주였기에 여러 쿠니진들은 이 아리마가에 종속되는 형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텐몬 7년(1538년), 아리마가가 한층 더 세력 확대를 도모해 이웃나라의 오오무라가에 보낸 것이 스미타다입니다. 장래에 스미타다가 오오무라가의 당주가 되어 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