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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 전국시대; 다케다 신켄의 등장 오미노구치성 기습전 일본 전국시대;다케다 신켄의 등장 오미노구치성 기습전 텐몬 5년(1536년) 첫 출진을 한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의 우미노구치성을 기습해, 점령했습니다. 가이의 수호 다케다 노부토라가 자국에 진공해 온 후쿠시마 마사나리를 격퇴했다고 하는 이이다 강변의 싸움의 중간에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다케다 신겐은, 텐몬5년(1536년), 단 16세에 성인식을 거치고 제12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이름을 받아, 하루노부(晴信)라고 자칭했습니다(그냥 신겐으로 통일해 쓰겠습니다). 당시의 가이는 동쪽은 호조가의 사가미, 남쪽은 이마가와가의 스루가라고 하는 대국과 접하고 서쪽은 아카이시산맥이라고 하는 거대한 벽에 막혀, 타국과의 왕래 자체가 곤란했습니다. 게다가 이 가이는 일설에는 그 어원이 산골짜기라고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텐분호케의 란 일본 전국시대;텐분호케의 란 텐몬 5년(1536년), 렌라쿠지 사중도가 오미의 롯카쿠 사다요리의 가세를 얻어 법화종도를 교토에서 공격해, 도성 안의 법화사원 21개소에 방화했으니, 이것이 바로 텐분호케(天文法華)의 란입니다. 니치렌(日蓮) 법화종(니치렌종이라고도 합니다)은, 포교 활동을 통해 종종 각 종파를 비판하거나 정권에 대해서 간언 하거나 했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니치렌 사후는, 그 수제자들에게 포교 활동이 계승해져 각 유파가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교토의 자치구민을 중심으로 점차 교세를 불려 갑니다. 그러나 법화종에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종교 세력이 커지면 정치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 이시대의 순리였지요. 당시 큰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혼간지 문도들의 잇코우잇키의 세력을 무서워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이마가와 요시모토 등장 하나구라의 란 일본 전국시대;이마가와 요시모토 등장 하나구라의 란 텐몬(天文)5년(1536년) 이마가와가의 집안의 다툼인 하나구라의 란(花倉の乱)으로, 오카베 치카쯔나(岡部親綱)가 스루가 카타노카미성(方ノ上城)을 공격했습니다. 전문을 보고싶으면 여기를 눌러주세요(미번역) 텐몬 5년 이마가와가의 당주 이마가와 우지테루(今川氏親)가 급사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우지치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 나간 「이마가와 가명 목록(今川仮名目録)」이라고 하는 법률을 발포한 일로도 알려진 명군으로, 제대로 영토를 지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정실의 아들 우지테루가 갑자기 죽고, 같은 날에 남동생의 히고고로우도 급사한 비극이 발생합니다. 우지테루에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부터 이 후계를 차지하기 위해, 이마가와가의 집안의 다툼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타데나와테 전투 일본 전국시대;타데나와테 전투 쿄우라쿠 3년(1530년), 히젠 타데나와데(田手畷)에서 오오우치(大内)측의 오키유키(杉興運)와 쇼니(少弐)측의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가 타데나와테 전투에서 나베시마 키요히사(鍋島清久)의 아카쿠마 군단 난입 작전에 의해, 쇼니측이 승리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와 히젠의 쇼니가는 큐슈 북부의 소유(周防)를 둘러싸고 싸워 왔습니다. 한때는 큐슈 북부의 대부분을 손에 넣고 있던 쇼니가였지만, 묘오6년(1497년) 오오우치 요시오키가 당주가 되고 요시오키가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와 그 아들 타카쯔네(高経)를 할복시키고 큐슈로 진출합니다. 쇼니가는 히젠국에서 쫓겨 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쿄우라쿠 3년(1530년), 양가는 다음 세대로 교대됩니다. 요시오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의 효웅, 사이토 도산의 등장 일본 전국시대;전국의 효웅, 사이토 도산의 등장 쿄우라쿠(享禄) 3년(1530년) 니시무라 간쿠로(西村勘九郎)가 나가이 나가히로(長井長弘) 부부를 살해하고 나가이가를 빼앗아, 나가이 신쿠로우(長井新九郎)로 개명했습니다. 이 니시무라 간쿠로가 바로 사이토 도산입니다. 도산의 전반생은 수수께끼 투성이입니다. '신초코기(信長公記)'에 '사이토 산죠우 도산은 원래 야마시로니시오카의 마츠나미 쇼고로(松波庄五郎)라 칭했다. 뒤에, 미노노쿠니의 나가이후지 사에몬에게 의탁해 도움을 받아 가세도 기른 뒤에 무정하게 주의 목을 잘라, 나가이 신쿠로우와 자칭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사이토 도산은 교토로부터 미노에 오고, 나가이후지 사에몬을 시중들었지만 비정하게도 주군을 죽이고 그 후, 나가이 신쿠로우와 자칭했다라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일본 전국시대;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묘오7년(1498년) 8월 25일, 토카이도해(東海道)에 추정 매그니튜드 8. 3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묘오 7년 지진으로 인해 쿠마노모토궁(熊野本宮)의 신전이나, 나치(那智)의 방사가 파괴되었습니다. 후에, 묘오 지진으로 불리는 대지진입니다. 이 지진에 의한 해일도 매우커서 가마쿠라 대불을 납입하고 있던 대불전이 해일로 파괴되어 이후 가마쿠라 대불은 지금처럼 밖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지진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 대지진에 의해서 입지를 굳힌 전국 무장이 있습니다. 미증유의 재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사는 희망을 준 일로, 그 후에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하는 미담이지요. 천년에 한 번일어날까 하는 재해에 휩쓸린 동북지방에서 민중의 입..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일본 전국시대;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다이에이6년(1526년), 오와(安房)의 전국 다이묘 사토미가가, 사가미의 후호조의 거점인 카마쿠라를 공격한 쓰루오카하치만궁 전투(鶴岡八幡宮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의 개막, 화려하게 그 무대에 뛰어 오른 사가미의 호조 소운. 그 소운에게서 배턴을 건네받은 2대째 호조 우지쓰나였지만 군웅할거, 하극상이 만연한 전국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이웃나라 오와의 사토미가와는, 항상 일촉즉발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다이에이5년(1525년)에는, 사토미가의 수군이 미우라 반도에 상륙 작전을 시도했습니다만, 후호조가의 분전에 의해 상륙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 사토미가는 다시 에도 만을 배로 넘고 미우라 반도에 쳐들어갑니다. 이 때의 사토미의 군세는 대소 수백..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츄코쿠의 분수령 모리와 아마고의 혼담 일본 전국시대; 츄코쿠의 분수령 모리와 아마고의 혼담 전국시대 츄고쿠 하면 모리 모토나리지만, 이때는 모리가의 상속자를 잇고나서 아직 2년째, 게다가 약관 27세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강성하다고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스오우를 본거지로 한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이어지는 수호이며, 이즈모를 본거지로 하는 아마코 쓰네히사는, 수호의 쿄고쿠와, 수호대의 가계인 아마고 쯔네히사를 스스로 넘어뜨려 1대로 츄코쿠 11개성을 지배하는 다이묘에 오른 걸물이었습니다. 서로의 영지 확대를 노리고 항상 싸우는 이 두 대영주아래에서, 모토나리의 모리가와 킷카와 요시쯔네의 킷카가는 그때그때의 형세에 의해서 아마고가에 협력하거나 오오우치에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에 모토나리의 아버지가 병사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노부토라의 가이 통일 이이다 강변 전투 일본 전국시대;노부토라의 가이 통일 이이다 강변 전투 다이에이 원년(1521년), 가이(甲斐)에 진공한 후쿠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가 격퇴한 이이다 강변 전투(飯田河原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 역사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이 없습니다. 중세 가이국의 기본 사료인 '카츠야마기'에도, 어떠한 상황이었는가 자세한 기술은 없고, 원래 후쿠시마 마사나리의 가이 진공에 관해서도 당시 스루가의 전국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명령에 의해서라는 이야기와 반대로 마사나리가 이마가와 대립한 끝 독단으로 진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이이다 강변 전투에서 이어지는 카미죠(上条)강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여겨지는 마사나리도, 정말로 이때 전사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관서의 오케하자마, 모리 모토나리 등장 아리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관서의 오케하자마, 모리 모토나리 등장 아리타성 공방전 에이쇼 14년(1517년) 10월 22일, 다케다 모도시게(武田元繁)에 공격받은 아리타성을 구원할 수 있도록 출진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모도시게를 토벌해 그의 첫 출진을 장식했습니다. 이때, 츄고쿠 지방에서는 스오우의 오오우치씨와 이즈모의 아마고씨가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주변 지방의 소호족들은 그 두세력의 중간에서 딱히 행동을 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세력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소호족들 간 분쟁의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오오우치가의 당주 오오우치 요시오키가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하고 상경해, 에이쇼8년(1511년) 후나오카산 전투에 승리하고 중앙에서의 실권을 잡는데에 반비례 하는 듯이, 부재중이 된 서쪽 지방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