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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일본 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 이라이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 이라이성 공방전 에이쇼 13년(1516년), 전국의 풍운아 호조 소운이 아라이성공방전을 마지막으로 사가미를 재패합니다. 사가미일대를 거의 손에 넣은 소운이지만, 아라이성을 거점으로 하는 미우라가에게 만은 아직 섣부르게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미우라씨의 당주는 미우라 요시아쓰였지요. 당시 80세를 넘은 소운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미우라가를 목적으로 정합니다. 이윽고, 에이쇼 13년(1516년), 관동 관령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 도모오키(上杉朝興)가 아라이성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이때를 기회라고 간파한 소운도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4년간이나 느긋하게 기다린 소운이었지만,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면 매우 민첩했지요. 조속히, 도모요시의 신.. 더보기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에이쇼9년(1512년), 호조 소운에게 사가미 오카자키성을 공격받은 미우라 요시아쓰가 스미요시성에 패주 했습니다. 소운은 바람처럼 등장해(이즈습격) 오다와라성도 손에 넣고(오다와라성 탈취) 호리코시쿠보도 멸하고, 이즈 일대의 지배를 강고한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공사를 보좌하는 역할 관동 관령직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 우에스기가의 분쟁은 어느덧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구적의 코가쿠보와의 전투로 넘어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는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나 그 부하인 소운을 의지하게 되어, 이윽고 에이쇼 원년(1504년)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가 있었지만, 승패는 불분명했지요. 하지만 확실해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누가 관령의 후예가 될 것인가? 후나오카산 전투 일본 전국시대;누가 관령의 후예가 될 것인가? 후나오카산 전투 에이쇼8년(1511년),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에 발발한, 일련의 후계자 분쟁인, '후나오카산 전투'가 있었습니다. 난세의 효웅으로 불린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그는 '묘오의 정변'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쇼군에 자신의 괴뢰를 앉히게 됩니다. 나중에 한번 묘오의 정변에 대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극상으로, 전국의 막을 열며 권력을 쟁취한 이 남자는 결국, 가신에게 암살이라고 하는 하극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사모토는 생전 여성에겐 흥미가 없어 독신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 있는 양자만이 세 명 있었습니다. 관백 구조 마사모토(九条政基)의 아들 스미유키(澄之), 아와의 호소카와가에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일본 전국시대;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에이쇼4년(1507년) 8월 7일, 나가오 다메카케(長尾為景)에 에치고를 빼앗긴 우에스기 후사요시(上杉房能)가, 마츠노야마고우(松之山郷) 아마미즈코시(天水越)에서 할복 했습니다. 나가오가는 대대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시중드는 수호대 집안입니다. 관동 관령직을 독점하고 있던 같은 우에스기가 내에서,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관동의 패권을 두고 싸운 에이쇼 원년(1504년)의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에서는 다메카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도와 참전했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째서 우에스기가에 반기를 들게 되었을까요? 가마쿠라쿠보가 기억나시나요? 그런데, 에치고에는 원래 그 토지를 지배하는 강력한 호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에스기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에이쇼 3년(1506년), 에츠젠에 진공해 온 카가 잇코우잇키를 아사쿠라 소테키(朝倉宗滴)가 격파한 쿠즈류가와(九頭竜川) 전투가 있었습니다. 묘오2년(1493년)에 묘오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당시의 10 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種)를 추방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인형과도 같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11 쇼군에 옹립한 마사모토에 대해서, 요시타네는 호쿠리쿠에 잠복 해서 세력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 그런 요시타네를 지지하는 세력을 일소할 수 있도록, 마사모토는 혼간지에 협력을 요청하였고, 제9대 법주인 지쯔뇨(実如)가 군세를 일으켰습니다. 사실상 마사모토가 혼간지를 묵인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묘오4년(1495년), 호조소운이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扇谷上杉)가의 중신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藤頼)가 지키는 오다와라성을 탈취했습니다.(년도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전국 3효융의 하나이고, 유일하게 5대, 100년에 걸쳐 군림한 호조가, 이 호조가가 대대로 본거지로 한 오다와라성은 원래 오우기가야즈 우에스기가의 성이었습니다. 사실 자세한 기록이 없기에 상세한 사항은 거의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엔토쿠워년(1491년), 혹은 묘오2년(1493년)에, '이즈습격'으로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차차마루를 추방하고 이즈를 손에 넣은 소운은, 관동 관령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 휘하에 있었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당주인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오오타 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엔토쿠(延徳) 3년(1491년) 또는 묘오(明応)2년(1493년),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아시카가 막부의 분가, 호리코시 쿠보(堀越公方)를 공격해, 멸망 시킨 싸움인 '이즈 습격'이 있었습니다. 분가라고는 해도 막부가 지방의한 무장에 멸해졌다는 이 이즈 습격을 전국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습니다. 엔토쿠 원년, 초대의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병사합니다. 그에게는, 적자 차차마루(茶々丸)와 측실 엔토쿠인(円徳院)이 낳은 쥰도우지(潤童子)라고 하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차마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양아치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흉포했기 때문에, 미치광이들을 가두어 두는 방과 같은 곳에 가두어 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일본 전국시대;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쵸우코우 원년, 오우미군(近江鈎)에 포진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롯카쿠 타카요리(六角高頼)의 부하 코우가 타케시(甲賀武士)등이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오닌의 난이후 막부 쇼군과 여러 다이묘들은 자주 대립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에서 오미(近江)남부의 전국 다이묘 롯카쿠 다카요리는, 오미우치의 문신령이나 절, 신사령을 계속 점거합니다. 당연, 문신이나 절, 신사는 무로마치 막부 제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 호소해 요시히사도 다카요리에게 퇴거하도록 언도합니다. 하지만 아시카가 쇼군의 군사력의 실추와 하극상의 도래 그리고 전국시대의 시작을 느끼고 있던 타카요리는, 쇼군의 말을 무시합니다. 타카요리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을 안 요시히사는, 쵸우코우원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시로의 쿠니잇키 일본 전국시대;야마시로의 쿠니잇키 분메이 17년 교토 야마시로에서 쿠니잇키기 발발해 하타케야마 양군세에 3개의 요구사항을 제출했습니다. 잇키는 벌써 두개나 보았습니다. 분메이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와 카가 잇코우잇키(카가의 잇코우잇키)였지요. 잇키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포스팅하나를 보고 오시면 됩니다. (잇키란 무엇인가?)이 두 잇키는 모두 혼간지 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는데요. 오늘 알아볼 쿠니잇키는 사실 시간상으론 카가의 잇코우잇키보다 3년 앞선 사건이지요. 어쨌든 이 잇키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날 코후쿠지대승(興福寺大乗院) 진손(尋尊)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야마시로(山城)의 국민들 중 위로는 60세부터 아래는 15세의 사람까지 모여 집회를 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일본 전국시대;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분메이 11년(1479년), 오닌의 난( 오오닌의 난) 이후에 교토에 머물렀던 야마나 마사토요가 영토인 타지마로 돌아왔습니다. 야마나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에서 서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손자(일설에는 아들)입니다. 동군의 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 사후에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화평을 맺어, 오닌의 난을 끝낸 사람이지요. 이 오닌의 난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대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막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오닌의 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무렵은, 동서 양자가 활발하게 전투를 벌이면서도, 막부아래에 관령가가 있고, 그 아래에 수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