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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에이쇼 3년(1506년), 에츠젠에 진공해 온 카가 잇코우잇키를 아사쿠라 소테키(朝倉宗滴)가 격파한 쿠즈류가와(九頭竜川) 전투가 있었습니다.



묘오의 정변(明応の政変)



  묘오2년(1493년)에 묘오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당시의 10 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種)를 추방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인형과도 같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11 쇼군에 옹립한 마사모토에 대해서, 요시타네는 호쿠리쿠에 잠복 해서 세력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 그런 요시타네를 지지하는 세력을 일소할 수 있도록, 마사모토는 혼간지에 협력을 요청하였고, 제9대 법주인 지쯔뇨()가 군세를 일으켰습니다. 사실상 마사모토가 혼간지를 묵인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혼간지가 마사모토를 돕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즉, 쫓겨난 선대 쇼군의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 다시한번 잇코우잇키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움직임에 동조한 것이, 아사쿠라 모토카게(朝倉元景)입니다. 이 사람은, 에츠젠 아사쿠라가의 당주인 아사쿠라 사다카게(朝倉貞景)의 숙부에 입니다. 예전에 그는 모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형이면서 항상 동생보다 아래로 취급해지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남동생 1명을 살해해 버려 아사쿠라가를 떨어져 마사모토의 가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 사다카게가 9대 당주를 이으려고 했을 때 스스로 아사쿠라가를 이을 수 있도록 암살 계획을 세웠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노토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토카게가, 이 때를 타 에츠젠에 진공하려고, 쵸우쇼우지(超勝寺)에 협력을 요청해, 카가, 엣츄, 노토의 문도를 인솔해 발기했습니다. 





 여기에, 아사쿠라가 이전에 에츠젠의 수호대였던 카이가의 잔당이 더해져, 총원 30만의 대군이 된 잇키의 군세는, 7 월초순, 에츠젠에의 진공을 개시합니다.  아사쿠라측의 대장, 당주 사다카게의 숙부 아사쿠라 소테키가 출진해 잇키와 쿠즈류 강을 두고 대치하게 됩니다. 소테키와 모토카게가 모두 사다카게의 숙부이지요. 사실 두 명이 함께 위의 암살 계획을 진행시키다, 소테키가 계획을 포기하고 모토카게를 밀고한 과거가 있지요. 공교롭지 않습니까? 또, 평생을 잇키와 싸운 소테키는 그 기나긴 싸움에 이 쿠즈류 강의 싸움이 막을 올립니다.



아사쿠라 소테키



  본래, 대장은, 군단의 지휘를 한다는 것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역할이지요. 스스로 싸우고 있어서는 지시를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보통의 이미지와는 달리 대장은 전선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테키는 생애 전체 현역 맹장으로 유명했듯이 스스로 칼을 들어 싸운 무장이었습니다. 이 쿠즈류가와 전투 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을 사이에 두어 대치하고 있던 한중간, 밤에 약 3000의 정예와 함께 강을 건너, 잇키군에 기습을 겁니다. 허를 찔러진 잇키군은, 아차 하는 사이에 완패해  토벌되는 사람, 강에 빠지는 사람이 속출해 괴멸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직 3분의 1 인10만 정도가 살아남았다고 하네요. 소테키는, 말위에서 장도를 휘둘러 적을 토벌해, 부하에게 벤 목을 모으게 한다고 하는 방식으로, 많은 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이쇼 3년(1506년), 잇키를 타파한 소테키, 쿠즈류가와에서의 승리에 힘이 난 사다카게는 여세를 몰아  혼간지의 주요 사원과 도장을 파괴했습니다. 이 쿠즈류가와 전투로 발단한 잇코우 잇키와 아사쿠라의 싸움은 후에 아사쿠라에 몸을 의지하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개로 양가의 자식이 화해하고 오다라는 적을 향해 단결할 것을 결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